정의
전라남도 장성군 북하면 백양사의 극락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 후기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개설
아직까지 초창과 관련된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이 불상의 정확한 조성 시기는 알 수 없으나, 2005년 2월에 발견된 복장물에서 1741년(영조 17) 명부전의 시왕상 중수와 함께 개금불사를 시행했다는 복장기와 1775년 개금불사를 시행했다는 중수기문이 발견되었다. 이를 통해 이 불상은 1741년과 1775년 두 차례에 걸쳐 중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1741년 중수에는 철관스님을 증명으로 취성, 사인, 계잠, 성순, 도환, 계초가 화원으로 참여하였으며, 1775년 개금 중수에는 백월, 색민, 정암 등이 참여하였다. 특히 중수 개금에 참여한 색민은 우수한 화적을 많이 남긴 불화승이다.
내용
착의법은 상의 위에 대의 자락을 오른쪽에 살짝 걸친 변형 편단우견에 이중착의로 표현되었다. 불의(佛衣)는 장대한 신체의 윤곽을 따라 다소 두껍게 입었으며, 수직의 주름을 같은 간격으로 새겨 넣어 장대한 신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왼쪽 측면으로 흘러내린 주름은 낙타의 등 모양으로 크게 M자형의 주름을 이루고 있고, 뒤로 넘긴 대의자락은 나뭇잎 모양으로 간결하게 처리하였다. 밋밋한 가슴에 군의(裙衣)의 윗단이 수평으로 처리되었고 복부는 볼록하게 처리하여 신체의 윤곽을 드러냈다.
무릎은 넓고 낮으며, 오른발을 앞으로 하여 앉은 길상좌이다. 안쪽으로 포갠 왼발은 대의자락 아래로 윤곽만을 표현하였다. 무릎 앞으로는 긴 나팔모양의 특색 있는 주름을 중심으로 좌우에 3, 4단의 수평주름이 펼쳐져 있다. 이와 같은 무릎 주름은 1606년에 수화원 각민(覺敏)이 제작한 공주 동학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이나 1612년 진주 월명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 1614년 구례 천은사 목조관음 · 대세지보살좌상 등과 비교된다. 또한 다소 무표정하고 형식화된 얼굴과 주름의 표현 방식, 장대한 신체 비례 등은 1629년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나 1633년 부여 무량사 소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수인은 두 손 모두 손가락에 리듬을 타듯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댄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이며, 손바닥에는 ‘キ’형의 손금을 음각하였다. 손은 따로 조각하여 둥글게 홈을 판 팔목에 끼우도록 하였다.
이 불상은 17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 현진(玄眞)이 1607년에 제작한 것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초기의 작품이라는 조각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백양사 문물의 불교문화학적 고찰」(사재동, 『불교문화연구』8, 한국불교문화학회, 2006)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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