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불상은 높이 83㎝, 무릎 폭 59㎝. 1650년(효종 1) 8월에 조각승 무염(無染), 성수(性修) 등이 제작하였다. 비로자나불좌상 바닥 면에 적힌 묵서(墨書)에 조성 사찰이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1650년(효종 1) 8월에 조각승 무염(無染), 성수(性修) 등이 제작한 후, 1861년 개금 · 중수기에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완주 대둔산 안심사(安心寺) 심검당에 봉안되었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전북도 지역에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이 언제 안심사에서 대전 비래사로 이운(移運)되었는지 알 수 있는 문헌은 남아있지 않다.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높이가 83㎝인 중형으로, 최근에 만든 대좌 위에 놓여 있다. 불상은 상체를 곧게 세우고 머리를 앞으로 약간 내밀고 있다. 머리에는 뾰족한 나발(螺髮)과 경계가 불분명한 육계(肉髻)가 있고, 반원형의 중간계주(中間髻珠)와 정수리에 윗부분이 둥글고 낮은 원통형의 정상계주(頂上髻珠)가 있다. 타원형의 얼굴에 가늘게 뜬 눈은 눈꼬리가 약간 위로 올라가고, 코는 콧날이 곧게 뻗었으며, 입은 살짝 미소를 짓고 있다. 목에는 완만한 곡선의 삼도(三道)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어깨에 걸친 대의자락은 목에서 수직으로 내려와서 가슴에서 팔꿈치 방향으로 거의 90도로 꺾여 늘어지고, 나머지 대의자락이 팔꿈치와 배를 지나 왼쪽 어깨로 넘어간다. 하반신에 늘어진 대의 자락은 배에서 오른쪽으로 몇 가닥이 완만하게 펼쳐지고, 가장 안쪽 옷단이 반원형을 이루면 짧게 늘어져 있다. 왼쪽 무릎 위에 소매 자락은 연판형으로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僧脚崎)는 상단을 수평으로 마무리하고 대각선으로 접혀 있다. 불상 뒷면의 대의(大衣) 처리는 목둘레에 끝단을 두르고, 왼쪽 어깨에 앞에서 넘어온 대의자락이 길게 늘어져 있다.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 검지를 치켜세우고, 오른손 검지를 왼손 검지가 지그시 누르고 있는 독특한 형태의 지권인(智拳印)을 결하고 있다.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바닥에는 묵서(墨書)로 1650년 8월에 화원(畵員) 무염(無染), 양사(養師) 성수(性修), 덕명(德明), 천유(天游), 수화(首畵) 경성(敬聖), 설엄(雪嚴) 등이 제작한 것으로 적혀 있다. 수화승으로 참여한 무염은 17세기 중반에 전국을 무대로 활발하게 활동한 조각승으로, 해심(海心)과 도우(道祐) 등으로 이어지는 조각승 계보를 형성하였다. 조각승 무염이 수화승으로 만든 불상은전북 고창 선운사 대웅보전 소조삼신불좌상(1633년)을 비롯해서 전남 영광 불갑사 대웅전 목조삼세불좌상(1635년), 전북 완주 안심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대전 비래사 봉안, 1650년), 강원 속초 신흥사 극락보전 아미타삼존불좌상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1651년), 전북 완주 정수사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1652년), 전남 영광 불갑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1654년), 완주 송광사 나한전 목조석가삼존불좌상과 16나한상(1656년) 등이다.
비래사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은 제작 시기, 조성자 등을 명확히 알 수 있고, 조각승 무염이 만든 기년명 불상 중에 가장 미적 완성도가 높아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에서 기준작이 되는 작품이다. 특히 비로자나불은 조선 후기 사찰에서 많이 제작되지 않아 비로자나불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