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55.8㎝, 가로 133.2㎝. 1868년 5월 11일에 제작되어 24일에 점안하고 봉안되었다. 증명은 덕산당 월조(德山堂 月照)가 하였고, 불화를 그린 화승은 금곡당 영환(金谷堂 永煥), 응륜(應崙), 윤감(允鑑), 응훈(應訓)이다. 화주는 비구니 의극(義極)으로, 조선 말기비구니들이 불화 조성 불사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던 시대상을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시주자들은 성씨만 있어 일반 서민들임을 알 수 있다.
청룡사 신중도는 하단에 비해 상단의 변색이 심한 편이고, 제석천과 범천의 신광에서는 금박이 부분적으로 탈락되어 있다.
화면의 구성은 상단에 범천과 제석천을 비롯한 천부중이, 그리고 하단에 위태천과 신장상이 배치되어 있다. 8곡병풍을 세우고 그 앞에 서로 마주보는 범천과 제석천을 하나의 연결된 신광에 놓은 점은 봉은사 신중도(1844년)와 비슷하다. 하단에 위태천의 투구 형태와 주변에 검을 세우고 있는 신장상의 형상은 현등사 신중도, 봉은사 신중도과 유사하여 서울, 경기도에서 활동했던 승려들의 복합적인 화풍을 볼 수 있다.
불화의 채색 기법 중에 고분법(高粉法)을 활용하고 있는 것도 특징적이다. 고분법은 신중상들의 신광, 금광저, 무기, 금관과 투구 등에 금박을 붙이는 기법이다. 19세기 후반 일반인들의 금 사용이 늘어나면서 불화 조성에 금을 남용하는 경향이 커지는데 청룡사 신중도는 이러한 시대 변화를 보여준다.
한편 이 불화에는 복장낭이 있는데, 그 표면에 다음과 같이 한글로 적힌 묵서 기록이 있다. “청신녀 무자생 최보리심 모든 부처님의 갑피를 입사와 모든 장해와 병마를 물리치시고 선지식을 만나 증득 보리를 깨달아 세세생생 성불하기 복원/ 청신녀 무자생 최보리심 모든 부처님의 갑피를 입사와 이 몸의 (현후) 병마와 장해를 물리치시고 선지식을 만나 생사를 넘고 증득보리를 깨닫기 복원○니다.” 즉 부처의 가피로 장애와 질병을 극복하고 선지식을 만나 깨달음을 얻어 성불하기를 기원하는 당시 일반 서민들의 기복적인 불교 신앙을 담고 있다.
청룡사 신중도와 함께 봉안되어 있는 복장낭에는 시주자의 이름이나 발원문이 쓰여 있어 19세기 후반의 신앙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불화는 화면의 구성과 채색 기법 등이 현등사 신중도, 봉은사 신중도를 계승하고 있어 서울 · 경기 지역의 유행했던 신중도의 한 유형으로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