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109.3㎝, 가로 77.5㎝. 조선 후기 화승(畵僧) 유선(宥善)이 1803년에 도성암(道成菴)에 봉안하기 위해 그린 현왕도이다. 현재는 작품 보호를 위해 유리 액자를 제작하여 요사에 따로 보관하고 있다. 현왕도의 화기(畵記)에 따르면, 가경팔년(嘉慶八年) 계해년(癸亥年)인 1803년에 도성암(道成菴) 노전(爐殿)에 봉안하기 위해 제작하였으며 금어(金魚)는 유선이 맡았다고 한다. 유선은 용주사(龍珠寺) 스님으로 화성(華城) 성역공사와 건릉(健陵) 조성에 참여하였다.
현왕도는 조선시대 불교 천도재(薦度齋)인 현왕재(現王齋)를 위해 조성한 불교회화로 현존하는 가장 이른 예는 1718년작 「기림사 현왕도」이다. 쌍계사 소장 현왕도는 현존하는 현왕도 가운데 비교적 이른 시기의 작례로, 등장인물들이 정면상의 좌우대칭형으로 배치되었던 정적구도에서 인물의 자세와 구도가 자연스럽게 변화해가는 19세기 현왕도의 초기적인 변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선은 1794년부터 1796년까지 수원 화성(華城) 건립에 참여하였고 1800년에는 건릉(健陵) 조성 공사에 참여하여,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1801년) ‘화공(畵工)’ 항목과 『건릉산릉도감의궤(健陵山陵都監儀軌)』(1800년) 「조성소의궤(造成所儀軌)」 항목에 용주사(龍珠寺)의 화공으로 이름을 올렸다. 유선이 제작에 참여한 또 다른 불화로는 1769년작 「불국사 석가모니후불도」가 있지만 크기 · 장르 · 화풍상에서 이 현왕도와의 비교를 논하기는 어렵다.
현왕도는 사람이 죽은 지 3일째 되는 날 설행하는 조선시대 불교 천도재인 현왕재의 회주(會主) 현왕과 그 권속을 그린 불교 회화이다. 명계불화로는 지장보살도와 시왕도가 명부전(冥府殿)에 봉안되는 반면, 현왕도는 대웅전(大雄殿)과 같은 주불전(主佛殿)에 봉안된다. 현왕은 지옥의 심판자인 시왕(十王) 중 5번째 왕 염라대왕의 불격(佛格) 보현왕여래(普賢王如來)를 지칭한다.
중앙에 현왕이 배치되고, 좌우로 권속이 둘러 배치되는 조선 후기 현왕도의 기본구성을 취하고 있다. 8곡 병풍을 배경으로 중앙 탁자 뒤에 현왕이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어 의자에 앉았다. 현왕은 머리에 경책(經冊)을 얹은 관(冠)을 쓰고, 두 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 홀을 잡았다. 현왕 좌우로는 판관(判官), 녹사(綠事), 시자(侍者)가 둘씩 서 있는데, 자세는 자유로우나 각각 좌우 대칭을 이룬다. 이와 유사한 구성의 현왕도는 19세기 전반기 작품은 확인된 사례가 없고, 1865년작 「안○사 현왕도」, 1868년작 「청룡사 현왕도」, 1888년작 「칠장사 현왕도」 등 19세기 말 서울 경기 지역에서 제작한 현왕도가 남아있다. 18세기의 현왕도는 정면상의 현왕과 좌우 대칭으로 권속을 배치한 정적 구도를 취한 것이 특징인데, 18세기 말부터 현왕의 자세가 반측면상으로 변하고, 권속의 배치에 있어서도 좌우 대칭 구도가 와해되는 경향이 생겨난다. 이 과도기적인 단계를 보여주는 작품이 쌍계사 소장 현왕도이다.
현왕의 관복을 비롯한 권속들의 의복과 탁자, 병풍 등의 지물에는 많은 문양으로 장식되었는데, 문양의 표현이 세밀하고 다양하다. 19세기 말 불화에는 세밀한 문양이 색채로 대체되어가는 경향이 있는데, 이 불화는 19세기 초 문양 사용의 경향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현왕의 머리에 얹어진 경책은 조선시대 천도재에 독경(讀經)되었던 금강경(金剛經)이다.
좌우대칭의 정적인 구도가 주를 이루었던 18세기 현왕도에서 자연스러운 자세와 등장 인물간의 유기적인 구성이 특징인 19세기 현왕도로 변용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19세기 초 현존하는 작례가 드문 경기 지역 현왕도로 19세기 후반 서울 · 경기지역의 현왕도와 연관성을 보여 지역성이 엿보이는 작품으로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