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응 초상화 ( )

이덕응 초상화
이덕응 초상화
회화
유물
문화재
석지 채용신(蔡龍臣)이 1916년에 그린 유학자 이덕응(李德應)의 초상화.
정의
석지 채용신(蔡龍臣)이 1916년에 그린 유학자 이덕응(李德應)의 초상화.
개설

2013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55㎝, 세로 69㎝. 이덕응의 초상화는 금관 조복 차림의 입상 1점, 복건 심의 차림의 좌상 1점, 장보관(章甫冠)에 도포 차림의 좌상 1점, 즉 총 3점이다. 이덕응은 일제강점기 유학자로 일제 때 화양도원(華陽道院)을 열어 후학을 양성하고, 화양산에 황단(皇壇)을 설단하고 황단제를 지낸 인물이다.

내용

이덕응의 호는 수당(守堂), 추운(鄒雲)이다. 덕흥대원군 11대손으로 종실 풍래군(豊萊君) 이번(李瀿)의 8대손이다. 부친은 동몽교관 이희식이며, 모친은 해주오씨 오문기의 딸이었다. 연재 송병선과 우암 송시열의 학풍을 계승한 근대 유학자이자 충신으로 간재 전우와도 교유하였다.

벼슬은 1900년(광무 4) 정월 4일 장릉(章陵) 참봉에 제수, 판임관에 승서되어 궁내부에서 『육전조례』 출간에 참여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자 비분강개하여 낙향하였고 김제를 거쳐 진안군 주천면 대불리 개화동에 터를 잡아 화양도원을 열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19년 고종황제의 붕어 소식을 듣고 화양산에 올라 3년 동안 백립과 상복을 갖춰 입고 망곡하였다. 이후 기울어가는 국운을 만회하고자 전라북도의 화양봉에 황단을 세웠고, 1932년 유림의(儒林議)에서 전라북도 선암봉, 제천봉, 천왕왕, 충남의 두문봉, 파초봉, 유제봉 등에도 황단을 세우고, 옥황상제, 공자, 고종황제 등 3위를 천지인(天地人) 대표 신명으로 제향하는 삼극제(三極祭)를 봉행하며 국태안민과 자주독립을 염원하였다.

채용신은 항일우국지사를 소재로 많은 초상을 남겼는데, 이덕응의 초상화들도 그 맥락에서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덕응 초상화들 중 양관 조복 입상은 공수 자세로 목홀을 들고 서있는 모습으로, 대한제국기 종9품의 능참봉 관직 시 제복(祭服)에 준하여 그린 것으로 보인다. 화면 밖 우측에 “수당이덕응오십일세상(守堂李德應五十一歲像)”이라 적혀 그의 51세 초상임을 알 수 있다. 3점의 초상화 중 금관 조복본에만 호패를 그려 넣어 이름과 그 아래로 2줄로 과시합격 연도와 출생 연도가 차례로 적혀 있어 그려진 인물의 신분을 밝히고 있다.

이덕응은 양관을 쓰고, 조복은 적초의에 깃, 도련, 소매 부분은 흑식(黑飾)으로 둘렀다. 종9품 관직에 맞게 적초(赤綃)로 만든 폐슬(蔽膝), 각대는 흑각대(黑角帶)를 두르고 번백옥(燔白玉)으로 만든 패옥이 양쪽 적초상 아래 늘어져 있다. 그리고 목화(木靴)를 신었다. 채용신이 그린 초상 인물의 배경은 바닥에 화문석을 깔거나 실내 병풍을 배경으로 하였던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원경의 소나무와 화사한 봄꽃이 핀 야외의 풍경을 장식처럼 그려 넣은 것이 특징이다. 화면 우측에 흰색 바탕에 붉은 선을 두른 부분에는 이덕응의 제자들의 초상인 「신기영 초상」이나 「조병순 초상」에서와 같이 붉은 글씨로 “성절기천영명단, 병진시칠월이십오일공(聖節祈天永命壇 丙辰始七月二十五日供)”이란 글귀가 적혀 있다. 이는 7월 25일 고종 황제의 탄신일을 맞아 1916년에 비로소 이덕응과 그의 제자들이 화양봉의 황단에서 황단제를 행하였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흑건에 학창의를 입은 좌상은 무릎을 꿇고 그 위에 소맷자락 안으로 모은 손을 얹은 단정한 자세로, 화양도원에서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백세포(白細布)로 만든 긴 포 형식의 옷에 넓은 소맷부리와 깃 등 옷단의 가장자리에 검은 비단으로 선(襈)을 둘렀다. 허리에는 역시 흑선을 두른 띠를 매고 있다. 작품의 배경을 옅은 파랑으로 담채하여 그윽한 실내 분위기를 연출하였고, 바닥은 화문석 대신 대청마루의 나뭇결을 그대로 살린 점이 특이하다. 화면 좌측에는 양각한 방인(方印)의 ‘석지(石芝)’, 음각한 방인의 ‘채용신장(蔡龍臣章)’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다.

장보관에 도포 차림의 초상은 평상복을 입은 전형적인 선비들의 초상으로, 소맷자락 안에 넣은 오른손에 들고 있는 것이 부채가 아닌 조복상의 목홀의 모습과 유사하다. 조대의 끝자락 술을 왼쪽 무릎 앞에 그려 놓았다. 이 작품 역시 심의본 좌상과 같이 배경에 옅은 파랑색으로 담채하였으나, 양쪽 귀 뒷부분에 배경색으로 메운 수정 흔적이 있다. 바닥은 채용신 초상에 자주 등장하는 화문석이 깔려 있다. 화면 좌측에 ‘석지(石芝)’, ‘채용신장(蔡龍臣章)’이라는 방인이 각각 찍혀 있다.

특징

채용신 초상화는 전통 초상화 기법을 계승하면서도 서양화법과 근대 사진술의 영향을 받아 독특한 화풍을 개척하였다. 이덕응 초상화는 모두 정면상으로 그렸으며, 화법 역시 극세필을 사용하여 얼굴의 육리문까지 세부 묘사에 주력하였다. 복식의 주름은 서양화법의 채색과 명암법을 차용하여 사실적으로 표현하였고, 초상화의 배경을 채색하거나 야외의 풍경으로 그리는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한제국기 관료 생활을 거쳐 일제강점기 화양도원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면서 고종황제를 위한 황단을 세워 제향하였던 이덕응의 51세 조복, 평상복, 유복 초상화 세트는 채용신 초상화의 전형적 특징을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말 20세기 초 초상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초상화 연구: 초상화와 초상화론』(조선미, 문예, 2007)
『석지 채용신』(국립현대미술관 편, 삶과 꿈, 2001)
「채용신 초상화의 형성배경과 양식적 전개」(정석범, 『미술사연구』13, 미술사연구회, 1999)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정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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