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11월 5일 충청남도 천원군 광덕면 대덕리 출생으로, 본관은 고흥, 호는 의당(衣黨)이다. 나병 연구의 권위자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장을 지낸 류준, 삼하연마 사장을 지낸 류상의 형이자 유관순 열사의 친척으로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 회장직을 수행했다.
1920년 서울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후 1924년 경성공업고등학교 방직과를 졸업했다. 1919년 중앙중학교 재학 당시 3·1운동에 가담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김성수가 설립한 경성방직의 초대 도감독(都監督)으로 재직하며 10여 년간 근무했다. 이후 풍림광공 감사, 삼하흥업 이사로 활동했으며, 조선공업기술협회 부회장, 조선광업협회 회장, 조선섬유협회 회장, 천선공업신문사 사장, 고려방직 이사 등을 역임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신탁관리배격대회(信託管理排擊大會)의 상무집행위원으로 활동했고, 조선청년연맹 기획위원직을 수행했다. 1947년 독촉국민회(獨促國民會)에 참여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대한국민회 소속으로 영등포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고, 제2대 국회에서 국민방위군사건 조사위원, 휴전정책 특별위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민주당에 입당해 1957년 8월 민주당 영등포 을 지구당 위원장에 임명되었으며, 민주당 소속으로 1958년 5월 실시된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등포 을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신민당 창당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며 1961년 신민당 중앙상무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민주당 구파로 이후 민정당 창당에 관여한 후, 1963년 7월 민정당 임시대의원회에서 김산 위원장의 탈당으로 공석 중인 서울시당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12월 민정당 비례대표로 제6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1964년에는 대일굴욕외교반대투쟁위원회 산하 서울시 반대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활동했고, 1965년 민정당 중앙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동료 의원들과 함께 한일협정 비준무효확인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민정당 내 대여당 투쟁을 강화하는 강경파로 분류되며, 민정당, 자민당, 민주당, 국민의당 등 당시 재야세력 단합운동에서 민정당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1965년 6월 민정당과 민주당이 통합해 만든 민중당의 조직위원장으로 임명되었고, 민중당내 친 신한당계인 명정회(明政會) 소속으로 당내 강경파로 분류되어 활동하다가 같은 해 8월 탈당했다.
이후 충무공기념사업회 상임이사, 인촌기념사업회 이사, 한국유지공업협회 회장, 한국통일촉진회 이사, 안중근의사숭모회 이사, 삼하흥업 사장, 서울통신공업 대표이사, 국민동지회 회장, 제2대 국회의원동우회 회장 등을 수행하다가 1989년 12월 9일 서울 동작구 노량진 자택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