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0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 출생으로, 호는 만헌(晩軒)이다.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해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21년 군산교육후원회 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2년 1월에는 군산 경신구락부(庚申俱樂部)에서 설립한 경신상업야학원(庚申商業夜學院) 경제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1923년 6월 군산부에 설립된 민립대학(民立大學) 지방부(地方部) 설립에 집행위원으로 참여했고, 같은 해10월 군산지역에서 정수영 등이 창립한 여명회(黎明會)의 연구부 임원으로 활동했다.
1927년 군산 제2공립보통학교 기성회준비회에 규칙초안 위원과 1928년 3월 군산부 의원자격으로 군산 공설시장 개선 연구위원으로, 같은 해 5월 친일단체인 군산 간화회(懇和會) 창립에 참여해 부평의장으로 활동했다.
해방 후인 1945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재정부장인 조완구의 요청과 기타 독립운동가들의 제청으로 결성된 애국금헌성회(愛國金獻誠會)의 중앙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전북 군산시의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2년 민주국민당의 중앙위원이자 정책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같은 해 5월에는 전북 출신 국회의원들이 연합해 이승만 대통령 및 장면 국무총리에게 전북지사 이성득의 실정을 지적하며 파면을 요구하는 청원을 올렸다. 또한 1953년 임시수도인 부산에서 일어난 정치파동 당시 국회의원들이 경찰의 안내를 받아 7월 발췌개헌안을 기립으로 표결하려고 할 때 끝까지 표결을 거부해 내각책임제 개헌안을 사수했다.
1954년 이후 재야 정치인으로 활동하며 민주당 창당작업에 참여해 민주당 신당발기준비위원회의 조직위원회 간사, 민주당 중앙위원회 중앙상무위원, 민주당 군산시당 결성추진위원, 민주당 전북도당 군산시당 전형위원, 민주당 군산시당 고문 등으로 활동했다. 1958년 5월 13일 서울 명륜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