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12월 13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임실군 출생으로, 1935년 전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조선일보 지국을 운영했으며, 기독청년회 임실군 회장, 독립촉성국민회 임실군지부 위원장, 귀환동포원로회장, 임실군축산조합 조합장, 청년연맹 임실군위원장 등으로 활동했다. 여수 · 순천 사건 때 고향에서 청년단을 통솔해 좌익들과 투쟁한 것을 계기로 정치에 투신하게 되었다.
1948년 5월 10일 실시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전북 임실 선거구 대한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1년 대한국민당이 해제된 후 자유당 소속 국회의원이 되었으며, 제2대 국회에서는 국회 내무위원회 소속 의원으로 경찰민폐특별조사위원회 위원, 태백산 및 지리산 일대 공비토벌 대책강구를 위한 소위원회 위원, 식량무지령 처분문제에 관한 진상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54년 1월 자유당 중앙당부 부장회의에서 조선민족청년단 소속의 자유당 반당분자로 제명처분 되었다.
이후 1956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후 민주당 대통령후보 신익희의 전북 임실군 선거사무장으로 활동하다가, 4·19혁명 이후 의원내각제로 헌법이 개정된 후 1960년 7월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북도비례대표로 참의원이 되었으며, 1960년 12월 민주당 구파가 분당해 창당한 신민당에 가담해 전북도조직위원, 국회 대책위원회 위원, 전북도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61년 4월 부정축재처리법의 발의에 따라 만들어진 부정축재특별처리위원회 처리위원에 임명되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야당을 통합해 만든 민정당의 창당 발기인 및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군정 연장반대 데모에 가담해 구속 기소되었다. 이후 민정당과 민주당이 통합해 창당한 민중당의 상무위원회 위원 및 전북 임실 · 순창 지구당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한일협정 국회비준을 계기로 민중당 강경파를 중심으로 창당된 신한당 창당에도 관여했다.
1967년 대선을 계기로 창당된 신민당의 대통령선거대책위원회 전북지구 부위원장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3선 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 위원, 민주통일당 남원지구당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정계를 은퇴하고, 명진환지(明進換地) 주식회사 이사 및 사장으로 활동했다. 1997년 7월 18일 오전 서울 강동구 길동 자택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