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5월 5일 충청북도 음성군 출생으로, 내무부, 국방부 장관 및 국무총리 서리를 역임한 신성모의 사위이다.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수료한 후 보통학교 교사로 잠시 근무했고, 1949년 3월 창립된 만방기업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했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고향인 충청북도 음성군 선거구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국회의원 당선 후 김동성, 이종성 등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함께 국회 교섭단체 추진을 위해 민우회(民友會)를 조직했고, 1952년 8월 부산정치파동을 통해 형성된 자유당 삼우장파(三友莊派) 소속 의원으로 당적을 옮겼다.
1954년 5월 실시된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충청북도 음성군 선거구에 자유당 공천을 받아 출마해 재선에 성공했다.
제3대 국회에서는 1955년 4월 군수용 원면의 부정처리 사건인 원면사건(原棉事件) 조사를 위해 국회 국방위원회 조사위원으로 임명되어 도진희, 윤재욱, 이정휴 의원 등과 부산, 대구, 광주 등지로 파견되었다.
1956년에는 제22회 정기국회에서 각 분과위원장 선거를 담당할 각 도별 총무위원으로 선정되었으며, 아울러 김창룡 중장 저격사건 조사 특별위원회 위원, 도진희 의원 관련 사건진상 규명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1957년에는 국방부 소관 예산안 축조심의를 위한 국회 국방위원회 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자유당 내 비주류파 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56년 6월 김상현, 최용근, 강승구, 홍순철 의원과 자유당을 탈당했다.
5·16군사정변 후 구 자유당 인사들의 정치세력화 모색을 위해 창당된 가칭 재건당에 참여했다. 1963년 2월 청우회(靑友會)의 충북 조직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63년 3월 군정세력에 반대하는 범야권 집결체를 목표로 발족된 민정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후 중앙사료공사 사장을 역임했으며, 무연탄 채굴 회사인 삼흥사광업 주식회사 회장, 한국해양개발주식회사 회장으로 활동했다. 1972년 1월 10일 뇌출혈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