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2월 20일 출생으로, 고창사립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축구부 선수로 활동했다.
1937년에는 조선신궁축구대회에서 중등부 우승을 차지했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38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해 축구부 선수로 활동하면서, 일제강점기 조선 축구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관서, 관동, 조선 전일본삼지방(全日本三地方) 축구대회에 출전했다.
1939년 6월 일본축구협회에서 김용식, 이유형, 현효섭, 박이석, 김희수 등 조선인 10명과 함께 일본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일본, 만주국, 중국 3개국 축구대회에 일본 국가대표로 출전하기도 했다.
해방 후인 1947년 3월 국내 축구 최고선수들을 모아 창단한 청백축구단(靑白蹴球團) 단원으로 선발되었으며, 1948년에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올림픽 대표선수로 차출되어 영국 런던올림픽 축구 경기에 출전해 예선 1차전에서 멕시코를 5대3으로 꺾는데 수훈을 올려 대한축구협회에서 선정한 우수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중에는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에서 군생활을 하면서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 축구 국가대표로 출전했으며, 이후 육군 특무부대 축구단의 코치로도 활약했다. 1954년 3월에는 스위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예선에서 일본을 제치고 우승해 같은 해 스위스월드컵에 국가대표 수비수로 출전했다.
38세까지 현역 선수로 활동한 후 은퇴했으며, 1957년 2월 대한축구협회 이사로 선임되었다. 제3회 도쿄 아시아경기대회에서는 축구 국가대표 코치로 참가해 준우승을 거두었다. 1960년 10월 14일∼21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 대회개최준비위원회 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1962년 3월에는 국가대표 축구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동년 6월 인도네시아 초청으로 친선경기에 참가한 국가대표 축구팀의 밀수사건이 불거지자 책임을 지고 국가대표 감독 및 대한축구협회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후 서울특별시 경찰국 축구단 코치 및 감독으로 활동하다가 주택은행 축구단 코치 및 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주택은행 감독 시절 대한축구협회에서 선정한 지도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한국신탁은행 축구팀 감독, 자동차보험축구팀 단장도 역임했으며, 이를 계기로 실업축구연맹의 전무이사, 부회장직을 역임한 후 1980년 회장에 임명되어 실업축구 1부, 2부 리그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1973년 5월 다시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태국 킹스컵 국제대회에 출전했으나 3위의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며, 1975년에는 그동안 한국 축구발전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문교부와 대한체육회의 추천으로 선정되는 대한민국 경기지도자 자격을 축구분야에서 한홍기, 김용식, 김규환과 함께 발급받았다.
대한축구협회에서 기술분과위원장, 전무이사, 국가대표 선수선발위원회 위원장, 부회장, 상임고문을 지냈으며, 그 외 전국시도대항 청소년축구대회 서울특별시팀 단장, 제10회 아시아청소년축구선구권대회 조직위원의 사무국장 및 선수선발위원회 위원장, 대한체육회 축구분야 대의원, 고우체육회(高友體育會) 경기분야 상임임원, 축구 원호연금 심사위원회 위원, 박대통령컵 국제축구대회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한일축구 정기전 한국대표단장 등을 역임했다.
1982년 12월 고혈압으로 병원에 입원한 후 회복되지 않아 1983년 1월 4일 서울 은평구 갈현동 자택에서 사망했으며, 대한축구협회장으로 효창운동장에서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문교부 선정 대한민국 체육상 및 체육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