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동관 규모는 영락제 때 북경에 설치된 것이 방사(房舍) 430여 칸 규모였으며 1431년(세종 13· 명 선덕제 6)과 1501년(연산군 7· 명 홍치제 14) 두 차례 수리, 증축을 거쳐 470여 칸으로 확대되었다. 1441년(세종 23· 명 정통제 6)부터는 회동관이 남관과 북관으로 구분됐는데, 북관은 명 왕부(王府) 공차(公差) 인원과 서역 국가, 서남 · 동북 소수 민족의 수령, 토관 및 그 사신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던 반면, 남관은 조선, 일본, 안남, 오이라트 등 조공국 사신과 그 수행 인원이 머무는 공간으로 쓰였다.
그러나 회동관은 단순히 중국 관료 및 외국 사신이 북경에서 머무는 숙소 이상의 기능을 했는데, 외교 문서를 처리하는 공적 사무 외에 각종 연회와 무역이 행해지던 곳이기도 했다. 조선 사행단 또한 회동관에 머물면서 예부에 표문과 방물(方物)을 바치고, 황제를 알현할 준비를 했으며, 통정사와 예부의 승인하에 무역을 행하였다. 이처럼 회동관에서 이루어지는 공식적인 교역 활동을 일컬어 회동관개시(會同館開市)라 한다. 회동관개시가 시작되면 조선사행단으로 참여한 역관, 상인들과 조정의 허가를 받은 중국 상인들이 회동관에 들어와 교역을 했다. 청나라 초기에는 홍려시(鴻臚寺)와 마관(馬館)이 회동관과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였고, 1748년(영조 24· 청 건륭 13)에는 조공 사신의 문서 관리를 담당하던 사역관(四譯館)과 통합되어 ‘회동사역관(會同四譯館)’이라 칭하였다.
회동관은 조선의 사신 일행이 머물렀으므로 ‘조선 사신관(朝鮮使臣館)’ 또는 ‘조선관(朝鮮館)’이라고도 한다. 회동관 남관은 옥하교의 곁에 있어서 ‘옥하관(玉河館)’으로 많이 불리었다. 명나라 때부터 조선의 사신들이 이곳에서 주로 유숙해 왔으나, 명청 교체 이후 1689년(숙종 15)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러시아가 북경에 진출하기 시작하면서 종종 러시아인들에게 양보하였다. 그 대신 조선 사신은 독포사(督捕司), 융복사(隆福寺), 지화사(智化寺), 북극사(北極寺), 법화사(法華寺) 등에 임시로 머물렀다.
1728년(영조 4· 청 건륭제 13)에 청과 러시아가 캬흐타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 정교회 수도 단체가 북경에 상주하면서 남관은 러시아인의 전용 관사인 아라사관(俄羅斯館)이 되고, 조선 사신들은 건어호동(乾魚衚洞, 현 감우호동(甘雨衚洞))에 위치한 도통 만비(都統滿丕)의 적몰 가옥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이곳을 러시아인들이 또 차지하자, 조선 사신은 기존의 남관에서 남서쪽으로 1리쯤 떨어진 곳에 신축한 남소관(南小館)으로 옮겨갔다.
때로 두 개 이상의 조선 사행이 북경에 동시에 체류할 때나 기타 사정이 있을 때에는 남소관과 함께 기존의 남관, 북관, 서관(西館) 및 건어호동관 등에 분산되어 유숙하기도 했다. 또 종친인 연행사(燕行使)의 정사는 일행과 별도로 회동관보다 훨씬 넓고 시설이 좋은 거경가(巨卿家)나 몽고 관사 등 특별 저택에 머물기도 했다.
회동관은 북경에 파견된 조선 사신들의 공적 활동의 거점으로서, 때로 환영 예절인 하마연(下馬宴)과 환송 예절인 상마연(上馬宴)이 거행된 곳이며, 중국인과 유구 사신들이 찾아와서 필담으로 교유하면서 국제 정세를 파악하던 곳이다. 또 사행이 귀국할 즈음에 사행의 수행원들 및 역관들이 중국 상인들과 며칠 동안 개시, 후시무역을 행하던 무역 거점이기도 했다.
회동관의 별관으로 불리던 남소관은 대략 4중으로 구분되어 관문(館門)을 들어선 후 첫째 집은 세폐(歲幣)와 방물을 보관하는 장소이자, 삼사신(三使臣)의 회합 장소[廳事]로 사용되었다. 둘째 집은 정사(正使), 셋째 집은 부사(副使), 넷째 집은 서장관(書狀官)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각각의 집마다 건넌방과 좌우의 익랑(翼廊) 등이 있어서 반당(伴倘)과 비역(裨譯)들이 나누어 거처했다. 그러나 이마저 장소가 협소하여 동쪽 담 밖의 개인 집을 구입하여 담장을 허물고 그쪽에 북캉[北忼]을 만들어 주방(廚房)이나 역관(譯官)들의 거처로 삼았다. 회동관의 관문(館門)은 삼사신이나 예부의 관원이 출입하는 때에만 열어 두고, 연행사 일행 중의 다른 사람들은 동쪽으로 난 협문(夾門)으로 출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