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공빈추숭은 광해군의 사친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추숭한 사안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소생이며, 둘째라는 정통성의 결함을 가지고 세자로 책봉되었다. 광해군은 선조의 대상이 끝난 후에 공빈 김씨를 왕후로 높여서 자신이 후궁 소생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왕위계승의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공빈 김씨는 1613년(광해군 5) 공성왕후로 추숭되었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다시 공빈으로 추삭되었다. 공빈추숭은 유교적 질서를 크게 어그러트리는 사건으로 국왕의 권위와 주동자들의 도덕성에 큰 흠이 되었다.
정의
광해군(光海君)의 사친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한 사안.
개설
역사적 배경
선조는 유일하게 국왕의 적자가 아닌 서손(庶孫)으로 즉위한 왕이었다. 즉, 선조는 중종의 후궁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아들 덕흥군(德興君)의 3자로 후사 없이 승하한 명종(明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출신으로 인해 선조는 대군의 탄생을 기다렸으나,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는 출산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선조는 대군으로 세자를 책봉하기 위해 기다리던 중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광해군으로 세자를 책봉하였다. 광해군은 선조와 의인왕후 박씨의 적통(嫡統)을 계승하여 즉위하였지만, 그 출생이 후궁 소생이며 장남이 아닌 차자(次子)라는 정통성의 결점을 가지고 즉위하였다. 이에 광해군은 선조의 대상(大祥)이 끝난 직후 생모 공빈 김씨를 왕의 사친(私親)으로 높이고자 하였다.
경과
광해군은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그해 3월에 독단으로 공빈 김씨를 자숙단인공성왕후(慈淑端仁恭聖王后)로 추존하고신주를 모신 사당의 이름을 봉자전(奉慈殿), 묘소를 성릉(成陵)으로 격상하였다. 역시 그해 6월 6일 공빈을 왕후로 올리는 책보를 올렸고, 종묘 부묘(祔廟)를 상의하도록 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 발생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마무리되자, 그해 12월에는 박홍구(朴弘耈) · 이지완(李志完)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책봉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615년(광해군 7) 6월, 사은사 윤방(尹昉) 등이 공성왕후의 고명(誥命)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에 8월 27일 신주를 고쳐 써서 9월 13일에 종묘에 부묘하였다. 그런데 명나라에서는 공성왕후의 고명만 보내고 관복을 보내주지 않았기에 1616년(광해군 8) 좌의정 이정귀(李廷龜) 등을 다시 보내 관복을 청하였다. 1617년(광해군 9) 명나라에서는 공성왕후의 관복을 내려주었고, 9월 17일 이를 종묘에 고함으로써 공성왕후를 추존하는 일련의 과정이 완료되었다.
결과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광해군사친추숭도감의궤(光海君私親追崇都監儀軌)』
- 『광해군과 친인척』(지두환, 역사문화, 2002)
- 「공빈 추숭 과정과 광해군의 모후 문제」(계승범, 『민족문화연구』48, 2008)
- 「1610년(광해군 2) 공빈 추숭과 『광해군사친추숭도감의궤』」(김종수, 『규장각소장 의궤 해제집』2,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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