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전 ()

조선시대사
유적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에 있던 조선전기 왕세자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궐건물. 동궁.
이칭
이칭
동궁, 춘궁, 세자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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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에 있던 조선전기 왕세자의 생활공간으로 지어진 궁궐건물. 동궁.
개설

1487년(성종 18)에 왕세자의 생활공간인 동궁으로 건립되었다. 1647년(인조 25)에 흉악한 물건들이 많이 발견되어 새로 영건하였으며, 숙종 초 이래로 임금과 왕비의 이어가 여러 차례 이루어졌다. 1764년(영조 40)에 화재가 발생해 저승전이 소실되었다. 이후 신하들이 중건을 요청했지만 영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역사적 변천

저승전은 1485년(성종 16) 정월에 짓기로 결정하고 세자궁영선소를 설치하였다. 같은 해 2월 4일에 건양문 밖의 동궁 터를 살펴보고, 영선소의 명칭을 춘궁조성도감(春宮造成都監)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한재가 심하여 공사의 착수를 연기하다가, 1486년(성종 17) 말이나 이듬해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1487년 7월 4일에 완공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 7월에 인종의 혼전을 저승전으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사간원에서 저승전은 동궁의 평소 거처이며 정전도 아니므로 부당하다고 하자, 명종은 이곳도 정전이라고 하였다. 이후 원상들과 의논하여 장소를 다른 곳으로 바꾸었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소실되었는데, 1609년(광해군 1) 3월에 ‘자전께서 임시로 저승전에 거처하고 계신다’라는 기록이 전하므로, 당시에 이미 저승전이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647년(인조 25) 8월에 사람의 뼈와 머리카락 등 흉악한 물건이 많이 묻혀있다고 하여 수리도감을 설치하였다. 1년여에 걸쳐 평선당(平善堂)과 함께 새로 저승전을 영건하였는데, 그 전말이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에 자세하다. 이때에는 인경궁(仁慶宮)의 동궁을 헐어 옮겨와서 세웠다. 건설 과정에서 행랑의 섬돌 안쪽과 담장 위, 기와 사이, 시민당 처마 아래의 섬돌 등에서 썩은 뼈, 죽은 까치, 옷을 태운 재 등의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는 강빈의 옥사와 관련된 사건으로 조작되기도 하였다.

숙종 초부터는 임금이나 왕비 등의 이어(移御)가 여러 차례 이어졌다. 1678년(숙종 4)과 1683년(숙종 9)에 임금이 이어하고, 1680년에는 중궁전이 병이 나서 이어하였다. 1681년에는 저승전 남별당에서 정사를 논의하였으며, 1683년에는 궁내에 재변이 있어서 이어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바로 왕대비 명성왕후가 이어하고 몇 개월 만에 서별당에서 훙서하였다. 이후에도 임금과 왕비들의 이어가 여러 번 있었고, 때로는 부분 수리가 이루어졌다.

1746년(영조 22)에는 월랑에, 1764년(영조 40)에는 이극문(貳極門)과 저승전에 불이 났다. 대신 등이 다시 수리할 것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이곳에 수장되어 있던 많은 서책들도 함께 불에 탔다.

내용

저승전은 시민당(時敏堂), 진수당(進修堂), 장경각(藏經閣), 추경원(秋景苑) 등으로 구성되었다. 시민당은 저승전의 남쪽에 있으며, 세자가 공부하는 정당이었다. 집의 명칭을 ‘시민’이라 한 것은 『서경(書經)』의 열명편(說命篇)에서 ‘학문에 민첩하기를 힘써야 한다[무시민(務時敏)].’는 의미를 취한 것이다. 세자의 생활공간은 ‘동궁’이라 별칭하였으며, 이곳에는 집무공간인 정당, 독서와 강학이 이루어지는 서연청, 일상생활 공간인 내당,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인 세자시강원[춘방(春坊)], 세자의 호위를 담당하는 기관인 세자익위사[계방(桂坊)] 등이 있었다. 경종도 세자 시절에 이 저승전에 머물렀다.

사도세자(思悼世子)가 태어나던 초기에 영조는 영빈 이씨(暎嬪李氏)에게 “진중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는 것이니, 칭호를 정하는 이때에 마땅히 그 규모를 크게 하여, 일시의 보고 듣는 것을 존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백일이 지나서 세자에게 경종이 전에 거처하던 전각으로 이어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이 전각의 이름을 ‘저승전(儲承殿)’이라 하였는데, 이때의 명칭이 처음 지어진 것은 아니다.

당시 영조는 집복헌(集福軒)에 있었으므로, 저승전과의 거리가 매우 멀었다. 1747년(영조 23)이 되자, 경춘전(景春殿)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졌는데, 그것은 거리가 가까운 편리함과 화평옹주(和平翁主)의 청을 따른 것이었다. 1749년 봄에 서정을 대리하라는 명으로, 세자가 시민당에 나아가 대리 조참을 받았다. 효종은 일찍이 무예를 좋아하여 한가한 날이면 북원(北苑)으로 나가 말을 달리며 무예를 시험하곤 하였다. 그때에 쓰던 청룡도(靑龍刀)와 쇠로 주조한 큰 몽둥이가 그때까지 저승전에 있었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인조실록(仁祖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저승전의궤(儲承殿儀軌)』
집필자
임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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