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후기에, 자의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771년(영조 47) 영조가 산림 세력을 당론의 온상으로 배척한 『유곤록』을 만들자, 상소를 올려 이를 논하면서 증조부 권상하를 변호하였다. 이로 인해 그해 3월 14일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는 대정현 창천리[오늘날 서귀포시 안덕면] 강필발(姜弼發)의 집이었다. 그는 스스로 호를 ‘산수헌’이라 하고 거처하는 집을 ‘창주정사(滄州精舍)’라 칭하였다. 창주는 ‘은자가 사는 곳’을 지칭하는 말로, 주자(朱子)가 창주에 정사를 짓고 학문을 강론한 데서 차용하였다. 그는 배소 근처 언덕의 바위에 자주 올랐는데, 시야가 확 트여 용연(龍淵)과 포구가 빗겨 보이는 전망이 장관이었다고 한다.
또한 송시열(宋時烈)이 제주도 유배 중에 거처한 곳을 돌아본 후, 제주도 유림들에게 유허비 건립을 제안하고 자신이 직접 비문을 썼다. 그 때 세워진 유허비는 제주시 오현단(五賢壇)에 현재까지 남아있다. 1772년(영조 48)에 연로한 나이로 특별 사면을 받아 해배되었다. 몇 해 후인 1775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참고문헌
- 『영조실록(英祖實錄)』
- 『제주도유인전』(김봉현, 제주시우당도서관, 2005)
- 『제주사인명사전』(김찬흡, 제주문화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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