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동곡(桐谷) 이조(李晁)와 급고재(汲古齋) 김담(金湛)을 추모하고자 1778년에 건립한 서원이다. 1868년에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된 후 1883년에 강당과 재실인 농운재(隴雲齋)를 중건하면서 목계정사(牧溪精舍)라 하였다. 서원이라 하지 않은 것은 훼철을 피하기 위한 조처였다. 현재의 목계서원에 이르기까지 두릉사, 두릉서원, 농운재, 목계정사 등으로 불렸던 사실은 다양한 자료에서 확인된다. 1778년에 복설을 추진하여 목계에 자리를 정하면서 위패를 봉안하고 예에 따라 향사를 올렸다고 한다. 강당과 동재만 남아있다.
정의
동곡(桐谷) 이조(李晁)와 급고재(汲古齋) 김담(金湛)을 추모하고자 1778년에 건립한 서원.
개설
역사적 변천
또한 「목계정사강당중수기」에 원래 네 명을 제향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처음 두릉사를 창건할 당시에는 이조만을 제향하다가 이건하면서 김담, 권도, 권극량을 합향하고 사림의 공의에 따라 서원으로 승원한 것으로 보인다. 1719년(숙종 45)에 이르러 1714년(숙종 40) 이후 신설한 서원을 금지한다는 명이 있자 단성현감이 명을 받들기에 급급하여 두릉서원을 아예 철거하였다고 한다. 사림도 그 법령의 기한에 어두워 명백히 분별하지 못하였다가 이를 알았을 때는 일이 이미 끝나고 사당도 폐허가 된 상태였다.
그 후 1778년에 복설을 추진하여 목계에 자리를 정하면서 위패를 봉안하고 예에 따라 향사를 올렸다고 한다. 초기 4인 중 2인은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완계서원(浣溪書院)으로 이봉(移奉) 하였으며, 전일과 같이 봉안한 사람은 이조와 김담이었다. 이봉된 인물은 안동권씨 가문의 권도와 권극량이었는데, 완계서원은 안동권씨의 문중 서원이었으며, 도천서원은 충선공(忠宣公) 문익점(文益漸)을 제향하던 곳이었다.
1868년에 훼철되었지만 1883년에 강당을 중수하여 목계정사라 하였는데, 서원이라 하지 않은 것은 훼철을 피하기 위한 조처였다. 한편, 1930년대에 편찬된 『교남지』에는 1713년(숙종 39)에 건립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는데 오기(誤記)로 보인다.
내용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교남지(嶠南誌)』
- 『급고재문집(汲古齋文集)』
- 『동곡선생실기(桐谷先生實記)』
- 『서원가고(書院可攷)』
- 『서원지총서(書院誌叢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한국서원총람』(한국서원연합회, 2011)
- 『경남의 서원』(구산우 외, 선인, 2008)
- 「도내각읍서원훼철사괄성책초」(이우성 편, 『서벽외사해외수일본총서』15, 아세아문화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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