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동양 제일의 절승(絶勝)으로 알려진 금강산 탐승객 유치와 원활한 교통기관의 정비를 목적으로 하였다.
금강산전기철도㈜는 공학박사 구미민지조(久米民之助)가 주도해서 공칭 자본금 500만 원으로 설립하였다. 1924년 8월 경원선 철원-금화 28.8㎞ 개통을 시작으로 1931년 7월 철원-내금강역을 잇는 116.6㎞의 선로를 부설하였다. 경영진은 초대 사장 구미민지조(久米民之助: 19191931), 제2대 사장 마월공평(馬越恭平: 19311933), 제3대 사장 고천반차랑(古川阪次郞: 1933-1942)의 면면이었다.
금강산전기철도㈜는 선구적인 유역 변경식 발전 수력을 겸하는 철도 운수업과 전등 전력 공급업의 겸업 경영이었다. 철도 영업은 표준궤를 도입해서 국철과의 화물 직통 연락을 추진하였고, 공휴일에는 경성-내금강을 잇는 야간 직행열차를 운행해서 금강산 탐승객의 집객과 유치에 주력하였다. 탐승객의 편리를 위해 금강산역 내의 장안사-온정리 구간을 잇는 자동차 운수업과 숙박업을 겸하였다. 금강산 탐승객은 1925년 당시 186명에 불과했지만, 1938년 2만 4892명으로 합계 15만 3106명을 기록하였다.
전등 전력의 공급 사업은 북한강 상류 화천강(化川江)의 수리권을 취득해서 조선 최초의 유역 변경식 수력발전 사업을 추진하였다. 1924년 중대리발전소(7000㎾), 1927년 판유리발전소(720㎾), 1928년 향천리발전소(3250㎾), 1936년 신일리발전소(2600㎾)를 시설해서 연선 부근과 경성 지역에 대한 전등 전력의 공급 사업을 추진하였다.
1942년 1월 전력 사업 합동 정책에 따라 경성전기(주)에 흡수 합병되었고, 경성전기(주)의 금강산전철선으로 재편되었다.
금강산전기철도는 당시 여타 사철 회사와 달리 철도 운수업과 전등 전력의 공급 사업을 겸하였다. 그래서 철도 운수업의 영업 부진을 전등 전력 공급의 영업이익으로 보충할 수 있었다. 1919~1941년에 걸쳐 금강산전기철도(주)가 수취한 사철 보조금은 1319만 원이었다. 금강산전기철도는 사철 보조금과 전등 전력 공급 사업의 영업이익으로 당시 조선 최대의 사철 조선철도(주)의 주주 배당을 능가하는 평균 9%를 유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