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회(同仁會)는 1902년 일본에서 조직되어 조선에 경무고문의(警務顧問醫)를 파견하고, 광제원(廣濟院) 개편과 대한의원(大韓醫院) 설립을 주도하였으며, 평양과 대구에 동인의원(同仁醫院)을 설립하는 등 통감부의 의료 정책을 지원하였다.
1902년 서양의학의 보급을 통해 동아시아 제국과 일본의 우의를 도모하며, 각국의 문명 발전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일본 의사들이 조직하였다. 구체적으로 중국, 조선을 포함한 아시아 각국에 의사위생(醫事衛生)의 학술 및 사업의 보급을 도모하고, 각국 민중과 일본 거류민의 건강을 보호하며, 병고를 구제하고, 아울러 사업을 통해 각국 인민과 일본민의 친화를 도와 교정(交情)을 돈독하게 하고, 또한 문명의 복리를 증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인회는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전 조선에 조직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경부·경의 철도의 건설 과정에서 전염병의 발발로 공사를 수행할 인력들에게 피해가 발생하자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인회 의사들이 조선에 파견되었다.
1909년 12월 관립 병원인 자혜의원(慈惠醫院) 설치를 계기로 군의(軍醫)들이 대거 조선 의료계에 진출하고, 1910년 총독부가 성립되면서 동인회의 조선에서의 활동은 종료되었다. 총독부는 식민 통치 사업의 일환으로 전국에 자혜병원 46개를 설립해 직접 운영하였다. 각 지역에 설립되었던 동인의원은 1910년 9월 폐쇄되었고, 건물과 설비는 자혜의원으로 이관되었다. 일본의 아시아 침략을 보조한다는 목적 하에 적극적인 조선 진출을 통해 통감부의 의료 정책을 지원하던 동인회가 총독부 시기에 접어들면서 불필요한 존재로 인식, 폐지되었던 것이다.
1907년 경무고문부가 고문경찰 확장 계획의 일환으로 경무고문의 47명을 증빙하기로 결정했을 때, 동인회가 이를 추천하였다. 또 동인회 의사가 각 지방에 파견되면서 통감부가 추진하던 위생경찰제도가 실질적으로 구축될 수 있었다. 통감부가 중앙 의료 기관에 해당하는 광제원을 개편하고자 할 때도 동인회는 의사를 파견하였다. 동인회 의사의 활동으로 광제원은 기존의 한의사들이 면직되고 서양 의료 기관으로 전환되었다. 나아가 동인회는 통감부가 기존의 의료 기관인 광제원, 적십자사병원, 의학교 소속 병원을 합쳐 대한의원(大韓醫院)을 설립하려 할 때 부회장인 사토 스스무(佐藤進)를 파견하여 설립을 도왔다.
동인회 의사들은 경의선의 중심역인 평양, 경부선에서 가장 큰 역인 대구에 동인회 소속 병원을 건립하였다. 평양동인의원은 나카무라 도미조(中村富藏)가 1906년 12월 1일에 개원하였다. 대구동인의원은 1907년 2월 10일에 개원하였다. 원장으로 이케가미 시로(池上四郞)가 취임하였는데, 실질적인 설립은 부원장으로 선임된 후지나와 분준(藤繩文順)이 주도하였다. 대구동인의원은 평양과 함께 철도국 지정병원으로 인정되어 철도에서 발생한 부상자 수용을 담당하였다.
동인의원의 일차적인 목적은 일본 거류민 진료였다. 하지만 해당 지역의 조선인 진료까지 담당하였다. 서양의학이라는 그동안 조선인이 소비하지 못했던 의료를 시술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신망을 얻고 신용을 쌓아 궁극적으로 일본의 선진성을 조선인에게 부식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인 환자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진찰료를 면제해주었으며, 약값과 치료비를 청구할 경우 일본인의 반액으로 감액하였고, 조선인 치료의 편의를 위해 온돌 병실까지 마련해 두었다. 빈민에 대해서는 외래와 입원을 불문하고 무료 진료를 시행하였다. 조선인 진료는 일본의 조선 진출 보조라는 동인회 본연의 목적을 현실화시키는 과정이었다.
각 동인의원은 서양의학을 교육하는 부속의학교를 개설하여 조선인 학생들을 교육시켰다. 평양동인의원의 경우 개원하기 전인 1905년 4월부터 의학 교육을 시작하였다. 원장의 도일(渡日)로 잠시 중단되었던 의학 교육은 1907년 5월 1일 ‘공립평양동인의원 부속의학교’라는 명칭 하에 재개되었다. 평양동인의원에서는 1910년 5월 13일 3학년을 마친 의학생들을 제1회 졸업생으로 배출하였다. 일본인 의학 교육기관에서 배출된 최초의 졸업생이었다. 이들은 졸업 후 1년의 교육을 더 이수하게 되었고, 1910년 의주, 광주, 춘천, 평양 등 각 자혜의원의 조수 및 견습으로 임용되었다.
동인회는 러일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조선을 지배하기 시작한 통감부를 의료적 측면에서 지원하였다. 하지만 병합에 즈음하여 군의들이 조선의 의료계를 장악하기 시작하면서 총독부에 의해 배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