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에서 면직된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동지회의 경제활동인 동지식산회사 설립을 계기로 도약을 꾀하였으나 1929년부터 회사 경영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또한 구미외교를 전담한다는 목적으로 설립한 구미위원부가 1925년 임시정부로부터 폐지 명령을 받아서 이를 계속 유지할 명분이 없는 가운데 재정 압박으로 자체 유지도 힘들 정도였다. 이승만은 이러한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1929년 9월부터 이듬해 1월 8일까지 북미한인사회를 순방하는 긴 여행을 단행했다. 자신을 지지하는 한인들로부터 재정 지원을 확보하기 위한 순방이었다. 하지만 1929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발생한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한인들로부터 기대했던 재정 지원을 확보하지 못해 이승만의 북미 순방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와이로 복귀한 이승만은 현 상황을 타개할 방안으로 하와이 한인사회를 동지회 중심으로 재편해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만들려 하였다. 이승만은 1930년 3월부터 김현구를 비롯한 하와이교민단의 핵심 인물들에게 민중 합동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한인협회와 대조선독립단의 인물들과 접촉하며 단체 간의 합동문제 논의를 시작했다. 이승만의 합동 논의 제의에 대해 하와이 한인사회의 일각에서 기존 단체를 해체할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자 이승만은 ①지방 자치단체의 통일은 교민단, 한인협회, 동지회, 독립단 사이에 충분한 양해가 생길 때까지 각각 현상 유지하고 상호 친밀해져 신념이 상통한 후 통일을 추진하고, ②민족운동은 시일이 매우 급하므로 동지회 중심으로 추진한다는 협상서를 대외에 발표했다. 그리고 1930년 4월 3일 동지회, 독립단, 한인협회의 세 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이승만은 하와이 한인사회의 세 가지 통일 원칙을 제시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민족운동을 위해 민중대회를 소집하자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장차 동지미포대회를 개최할 것을 염두에 둔 제안이었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 한인협회는 박상하·김진호를, 독립단은 이상호·김윤배를, 동지회는 이종관·정인수를 선출해 한인사회의 통일을 위한 교섭위원을 선임하였다.
동지회 중심의 합동 분위기는 1930년 6월 8일 한인기독학원에서 개최한 동지회간친회(同志會懇親會)를 계기로 더욱 성숙되었다. 남녀 200여 명이 참석한 간친회에는 교민단 단원들과 독립단 단원들, 그리고 중립측 사람들이 대거 참석하였다. 참석자들은 그동안 정치상 이견으로 15∼20년간 서로 담을 쌓고 상종은 물론 인사조차 하지 않았으나, 이번 모임을 계기로 과거의 잘못들을 후회하고 모두 동지회의 회원이 되어 다 함께 일해 볼 것을 다짐하였다. 이같은 좋은 분위기는 결과적으로 동지회의 회원 가입을 크게 증대시켰다.
이승만은 동지회간친회의 성과를 동지회 창립 이래 처음 보는 성공적인 모임으로 평가하고 하와이 한인들의 합동이 곧 우리 민족의 살 길이니 대업을 위해선 무엇보다 사심을 버리고 동지회 중심으로 단결하자고 역설하였다. 이어서 1백만 동지 회원을 확보하기 위한 동지회의 주요 사업의 방향을 첫째, 『태평양잡지』를 확장하여 영문란을 설치하고, 둘째, 원동에 선전부를 두며, 셋째, 청년부를 별도 설치하여 청년들의 민족성을 계발시키며, 넷째, 각 단체와의 합동을 추진해 인물과 민심을 동지회로 집중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사업 방안은 동지미포대표회 때 그대로 반영되었다.
동지미포대표회는 1930년 7월 15일부터 21일까지 7일간 호놀룰루에 있는 하와이 교민단총회관과 신흥국어학교에서 연 8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성대히 개최되었다. 하와이 대표 외에 북미에서 온 대표는 시카고 대표 김원용과 나성 대표 최영기가 참석했다.
동지미포대회에서 의결한 내용은 ①동지회 헌장 통과, ②위원부와 임시정부 법통관계에 대해 선언문 발표, ③구미위원부에 대한 동지회의 극력 후원, ④회기·회표·회가는 중앙부에 위임, ⑤여자 동지 회원에 한해 특별금 10달러 이상을 부여, ⑥3·1절 기념금으로 1달러 이상 특출하여 중앙부에 저금, ⑦특별금(유지금)은 매 회원이 30달러 이상 균일화, ⑧원동 방면에 선전부를 두는 권한을 이사부에 위임, ⑨연례금은 매년 매 회원 당 2달러로 확정, ⑩동지회의 행정부 구성은 실업부·외교부 ·선전부·장재부·청년부 등 5부로 확정, ⑪동지회 명부록을 만들어 배포함, ⑫3대 정강을 불변·확정함, ⑬동지회를 독립운동의 유일한 정치단체로 확정 등 13개 항이었다. 이들 가운데 동지회의 헌장과 정강을 확정한 것과 구미위원부와 임시정부 사이의 법통 관계를 정리한 것, 그리고 동지회를 독립운동의 유일한 정치단체로 인정한 것은 이번 대회의 중요한 성과였다.
동지회는 새로 개정된 헌장에 따라 설립 목적을 조국 광복에 두었고 3대 정강을 실천 방침으로 삼았다. 3대 정강은 첫째, 우리 독립선언서에 공포한 바 공약삼장을 실시할지니 3·1정신을 발휘하여 끝까지 정의와 인도를 주장하여 비폭력의 희생적 행동으로 우리 대업을 성취하자, 둘째, 조직적 행동이 성공의 요소이니 우리는 개인 행동을 일절 버리고 단체 범위 안에서 질서를 존중하며 지휘를 복종하자, 셋째, 경제 자유가 민족의 생명이니 자치자급을 함께 도모하자이다.
동지회의 조직은 공중의 추대로 선택한 총재 이승만을 중심으로 중앙이사부와 대표로 나누었다. 중앙이사부는 이사장을 포함한 9인과 행정 집행을 위한 5부로 구성했다. 특히 총재의 절대 권한을 강화해 이승만 중심의 동지회가 되도록 만들었다. 새로 조직한 중앙이사부는 이사장 이용직, 재무 겸 상무원 김원용을 비롯해 이사원으로 김현구·김경준·손덕인·차신호·박상하·김윤배·김광재가 선임되었다. 이들 인물들을 세분화 해 보면 하와이 동지회 대표 김현구와 이용직, 미주 동지회 대표 김원용, 교민단 대표 김경준·손덕인·차신호·김광재, 대조선독립단 대표 김윤배, 중립자측 대표 박상하로 분류된다. 이러한 인적 구성은 동지회 중앙이사부가 전 미주한인사회를 대표하는 최고의 독립운동 기관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때문에 이승만은 이번 대표대회를 민족운동의 한 서광으로 평가하고 군인의 조직체와 같이 동지회의 기치 아래 복종하여 일백만 동지를 규합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처럼 동지미포대표회는 외형적으로 볼 때 한인들의 많은 관심 속에서 동지회의 대내외 위상을 다진 성공한 대회였다.
그러나 실제 내용면에서는 내부 불만이 크게 잠재되어 있었다. 심혈을 기울여 조직한 동지회 중앙이사부가 이승만과 일부 이사원 간의 불화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여 대회가 끝난 지 두 달이 지난 9월 26일에 가서야 그 인선 내용을 발표하였다. 이렇게 구성원 내부가 일치단결되지 않은 것은 대회 이후 이승만과 한인기독교회 목사 이용직, 이승만과 국민보 주필이자 태평양잡지 편집인인 김현구, 이승만과 교민단장 손덕인 간의 잇따른 불화로 결국 동지회와 교민단 사이에 ‘민중화’라는 명의로 이승만의 독선에 대항하였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대회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통합과 통일의 분위기가 아니라 전면적인 분쟁으로 치달아 동지회와 교민단이 완전히 분열되는 상처만 남겼다.
동지미포대표회는 이승만이 하와이를 비롯한 재미한인사회를 동지회 중심으로 재편하기 위한 대회였다. 대회 결과 기존의 단체들을 동지회로 통합해 동지회 종신 총재 이승만을 중심으로 유일한 독립운동의 핵심기관으로 만들 것을 의결했다. 그러나 기존 세력인 하와이 교민단의 반발로 오히려 이 대회 이후 동지회와 교민단 간의 분쟁을 초래해 한인사회를 분열시킨 대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