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를 사살하자 대한제국 왕실과 내각, 그리고 여러 사회 정치 세력은 충격을 받은 채 일본정부의 조선 병합정책을 예의 주시하였다. 곧이어 1909년 11월 이토를 기리는 추도회의 준비와 개최를 통해 권력 구도의 재편을 도모하면서 이합집산을 반복했다.
이토의 장례식은 11월 4일 거행되었다. 장례식을 전후해서 일부 배일적인 단체나 인물을 제외하고 대한제국 왕실 및 정부를 비롯한 상층 관리들이나 대부분의 계몽단체와 인물들은 이토를 기리는 크고 작은 추도회를 개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관민추도회(官民追悼會)’였다. 이는 대한제국 정부 주도로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가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1909년 11월 4일 장충단에서 개최된 추도회는 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전현직 관료, 그리고 전국적으로 각계각층의 사람 1만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치러졌다. 대한제국 왕실과 정부가 추도회를 관민합동으로 거행한 것은 한국민들의 총체적인 애도가 이뤄지고 있음을 일본에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한성부민회 주최로 각 단체와 인물들이 연합하여 추진한 ‘국민대추도회’도 계획되었다. 한성부민회의 발기로 11월 26일 오후 1시 한성부민회관에서 전국민 추도회를 개최하며, 특히 13도와 각 항구 대표자에게 알리고 준비위원으로 100명을 선출한다는 계획이었다. 이 추도회는 정부 주도의 관민추도회와는 달리 한말의 대표적인 자치단체인 한성부민회가 주도하고, 대한협회·일진회의 협력과 기타 대표적인 사회단체들의 인물이 모두 망라되어 추진된 행사였다. 그러나 국민대추도회는 각 단체 간의 이해가 엇갈려 실행되지 못했다.
관민추도회와 국민대추도회 외에도 일진회가 주도한 ‘신녕군추도회(新寧郡追悼會)’ ‘한자신문사추도회(漢字新聞社追悼會)’ 등이 있었고, 이완용 계열의 추도회로 볼 수 있는 ‘한자통일회추도회(漢字統一會追悼會)’도 있었다.
이토 추도·추모 행사의 특징은 관민추도회나 국민대추도회를 제외하면 모두 단일 단체에서 주최한 행사였고, 행사 주체가 ‘친일 성향’의 단체들이었다는 점이다. 특히 이토의 덕을 기리는 송덕비건의소(頌德碑建議所), 동아찬영회(東亞讚英會) 등의 추모행사가 기획되면서, 이후 친일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