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개혁 시기 내무대신으로 개혁을 이끌던 박영효(朴泳孝)는 궁중 호위병 교체 시도를 둘러싼 역모 혐의로 실각하고 1895년 7월 조선을 떠났다. 박영효는 1896년 5월 이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에 있던 조선인 망명자들을 규합하고, 이들과 조선내 동조자들의 협력을 얻어 고종을 폐위하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려는 정변을 계획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 시기부터 1897년 대한제국 성립 후 몇 년간 군주권을 위협한 정치세력은 독립협회와 일본에 있던 조선인 망명자들이었다. 독립협회를 구성하던 여러 정치세력은 일본의 망명자들을 끌어들여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고, 이런 움직임을 감지한 고종은 독립협회의 움직임 보다 일본의 망명자들에 대해 더 많은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에 있던 조선인 망명자들을 규합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박영효였다.
1898년 조선에서 독립협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박영효의 귀국을 요청하거나 등용을 건의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를 등에 업고 박영효는 1898년 10월 측근인 이규완(李圭完), 황철(黃鐵)을 조선에 파견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군주를 옹립하여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려는 정변을 시도했다. 이 정변이 계획 단계에서 발각되었지만 박영효는 조선으로 귀국하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박영효는 일본, 러시아, 영국 등 외세의 힘을 빌리지 않고 조선 내 동지들을 규합하여 정변을 실행하려는 계획을 다시 세웠다. 1900년 10월에 한성을 습격하고 의화군(義和君: 의친왕 이강)을 황제로 옹립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조선 정부 인사들과 연계하여 거사 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활빈당을 조직하여 경상도 지역에서 거사 자금을 모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0년 8월 활빈당을 토벌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파견된 고성 지방대에 모금을 하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박영효의 거사 계획도 실패로 끝났다.
두 차례의 정변 시도가 실패한 이후 박영효의 추종세력들은 죽거나 분열되었으며, 그 자신도 조선 내 정치 세력들을 불신하고 이들과 대립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또한 그는 고종을 폐위하고 새로운 군주를 옹립하려는 정변을 구상함으로써 고종을 비롯한 국내 집권 세력에게 크게 위험시 되었다. 그 결과 국내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제약되었고 조선에서 파견된 암살자들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이후 박영효는 ‘반일’이라는 공동 목표 아래 국내외의 여러 정치 세력들과 연합하여 적극적으로 일본에 저항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