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자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부각시키기 위해 천도교, 개신교 등 종교계를 중심으로 전 민족적 독립 의사 표명을 위한 3·1독립운동이 추진되었다. 이때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 대표자들을 중심으로 학생단 주도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독자적인 운동을 추진하던 서울의 연희·보성법률·경성의학 등의 전문학교 학생들은 민족 대표 측의 일원화 요청을 수용하였다. 이에 3월 1일의 독립 만세 시위운동에는 민족 대표와 행동을 함께 하고, 3월 5일에 학생단이 제2의 독립 만세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앞에는 귀향하는 지방 인사들과 시민 학생 수만 명이 모였다. 연희전문학교 김원벽(金元璧)과 보성법률상업학교 강기덕(康基德)이 각기 인력거를 타고 “조선독립”이라고 크게 쓴 깃발을 흔들며 군중을 이끌고 남대문 방면으로 향했다. 군중 속에서 「조선독립신문」이 뿌려졌다.
시위대가 남대문 부근까지 진출하자 경찰대가 강력히 저지하여 지휘자인 김원벽과 강기덕 등이 붙잡혀 갔다. 그러나 경찰 저지선을 돌파한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였다. 남대문시장으로부터 조선은행 앞을 지나 보신각 부근에 이르러 경찰대의 야만적 저지로 해산되었다.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학생단이 이끈 독립 만세시위는 3월 3일 고종 황제의 국장에 참관했다 귀향하던 수만 명의 군중이 참여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 때문에 3월 1일의 독립선언의 당위성을 재확인하면서 전국에 만세 시위운동을 확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학생들은 독자적인 독립선언서를 준비하는 등 독립운동의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등장했으며, 이후 국내 독립운동에서 주역으로 활동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