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 대표의 독립선언과 만세 시위가 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장안면 수촌리 천도교 순회 전도사 백낙열(白樂烈)과 팔탄면의 김성열(金聖烈) 등은 서울 만세 시위에 참여하고 돌아와 인근 지역 만세 시위를 추진하기로 계획하였다. 3월 말 또는 4월 1일을 전후하여 장안·우정면 지역에서는 산상 횃불 시위가 퍼지고 있었으며, 수원·안성 일대에서 강력한 만세 시위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1910년대 무단통치를 펴던 일제는 면의 기능을 강화하여 대부분의 면장을 친일적 인사로 교체하여 지방행정을 재편, 장악하였다. 이에 대해 구장(區長)[현재의 이장(里長)]들은 주민의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 장안면은 그 대표적인 곳으로, 4월 3일 아침 장안면 각 마을 구장들은 마을 사환을 시켜 집집마다 연락하여 전 주민을 동원하였다. 오전 10시 반경 200명이 장안면 사무소에 모여 면장에게 독립 만세를 부르게 한 후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우정면과 경계에 있는 쌍봉산으로 갔다.
쌍봉산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우정면 주민들과 합세하여 군중은 2000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우정면사무소를 부수고, 다시 대열을 지어 화수리로 나아가 주재소를 불태웠으며, 총기를 발포하여 인명을 살상한 가와바다[川端豊太郎] 순사를 추격하여 처단했다.
4월 4일 새벽 일본군 제20사단 39여단 78연대 소속 아리다[有田, 제암리 학살의 주역] 중위가 이끄는 1개 소대 병력의 방화 총격을 시작으로 수차에 걸쳐 무단 발포와 야간 수색이 자행되었다. 주택 276채에 방화하고, 수천 명의 주민들에게 고문을 가하였으며, 그 중 34명을 기소하여 최고 징역 10년 형에 처하였다.
수원군 장안면의 시위는 3·1운동 기간 중 가장 강력한 공세적인 만세 시위 중 하나였다. 3·1운동에서 인명 살상의 사례가 극히 드문 가운데 이 지역 만세 시위에서 일본 순사를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고, 이로 말미암아 혹독한 보복을 당하였다. 장안면 시위는 이웃 우정면 주민들과 함께한 연합 시위로서, 독립 만세 시위가 확산되면서 점차 지역의 공동체적 응집력과 결합하여 강력한 시위운동을 이룬 대표적인 사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