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군 이죽면은 구 죽산군 시절 군소재지였으나,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성군 이죽면이 되었다. 안성군의 3·1운동은 매우 치열했다. 1919년 3월 11일 안성 읍내에서 50명의 시위가 있었다. 그 후 산발적인 시위가 이어지다가 3월 30일 5~600명의 시위, 3월 31일 3000명의 시위가 다시 안성 읍내에서 벌어졌다. 4월 1일에는 안성군 원곡면과 양성면에서 격렬한 만세 시위가 일어나 양성주재소와 원곡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우편소, 양성면사무소, 일인 상점들을 파괴하였다. 이 원곡과 양성의 만세 시위는 일제가 민족 대표 재판에서 언급했던 평북 의주군 옥상면 시위, 황해도 수안군 시위와 함께 전국 3대 의거의 하나이다.
4월 1일 이죽면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명은 교정에서 독립 만세를 부르고, 두현리민 등 수백 명과 함께 죽산경찰서 주재소와 면사무소에 몰려가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 때 두현리 이기훈(李起薰)과 이응식(李應植), 장재리의 최창달(崔昌達)은 두현리에서 도로 보수 부역을 하던 인부들에게 ‘조선독립만세’를 부르자고 하며 죽산 시위에 참여하게 하였다.
4월 2일 죽산시장에서 이죽면 장원리·장계리·죽산리·매산리 등지 주민 2000명이 야간에 모여 죽산경찰관 주재소, 우편소, 면사무소, 보통학교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죽산공립보통학교 학생 50여 명은 이날도 태극기를 받들고 죽산시장 시위에 참여하였다.
일제는 순사 3명, 보병 하사 이하 4명을 출동시켜 발포함으로써 사망 3명, 부상 8명의 인명 손상을 입혔다. 양재욱을 비롯하여 20명이 1년 6개월~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4월 2일에는 인근 일죽면에서 농민, 잡화상, 해물 소매상 등 약 200명이 주천리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4월 3일에는 삼죽면에서 주민 3백 명이 면사무소를 습격하고 격렬한 시위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무차별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하였다.
안성군은 전국에서 손꼽힐 정도의 대표적인 공세적 만세 시위를 전개한 곳이며, 이죽면 만세 시위도 그 가운데 하나로서 안성 군민들의 강한 민족의식과 독립 정신을 보여 준다. 이죽면 만세 시위는 전국적인 만세 시위 확산에 한 축을 담당했고, 인근 일죽면과 삼죽면의 만세 시위에도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