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에 식민지 조선에는 세계공황과 일본 내부에서의 산업통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일본 자본이 진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 이들은 식민지 조선과 만주 및 중국 시장으로의 진출을 목적으로 대규모 투자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 내부에서도 섬유제품의 수요가 증가하여 전체적으로 섬유류 가격이 상승하자 면(綿)과 인견(人絹)을 비롯한 여러 섬유 제조 기업들이 설립되었다.
조선직물주식회사는 직물 제조 판매, 직물 및 직물 원료의 염색 정리 가공, 직물 및 직물 원료의 매매, 이와 관련된 사업에 투자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2년 11월 11일에 이토추상사(伊藤忠商事)가 박승직(朴承稷: 두산그룹 창업자) 등과 합작하여 설립한 공익사(共益社)가 중심이 되어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 872-1 안양역 앞에 설립하였다. 설립자는 다카이 효자부로(高井兵三郞)였다. 초기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경영되었으며, 조선인은 감사로 박승직만 참여하고 있었다. 1934년에 100만원의 자본금 중에서 37만 3750원을 불입하였고, 1938년에는 79만 1250원을 불입하였다. 2만주의 주식과 133명의 주주가 참여하였으며, 1940년에 자본금 100만원을 모두 불입할 정도로 규모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직물주식회사는 1944년에 동양방적주식회사 안양공장과 함께 징발되어 조선비행기주식회사로 전용되어 비행기 제작에 활용되기도 하였다. 박흥식(朴興植: 화신그룹 창업자)이 주도했던 이 사업은 1944년 5월부터 시운전을 시작하여 6월부터 일부 작업을 시작하였다. 당시 직원이 650명, 공원이 약 1700여 명이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해방 이후 귀속 기업체였던 조선직물주식회사는 1952년에 금성방직의 김성곤(金成坤: 쌍용그룹 창업자)에게 불하되어 운영되다가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 전후 원조기관과 정부의 지원을 통해 새로운 설비로 재건된 금성방직은 1968년에 대한농산[회장 박용학(朴龍學)]에 인수된 이후 1973년에 주식회사 대농(大農)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1977년까지 운영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견 직물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일본에서 수입한 인견 직물을 취급하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인견 직물을 직접 생산하기 위해 만든 회사이다.
최초의 대규모 인견 생산 공장으로 약 2만 평의 대지에 건평 7000평, 직기 168대에 염색 설비까지 보유할 정도의 규모를 갖추었다. 이 회사를 선두로 대창직물(大昌織物)을 비롯해서 인견 직물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업체들이 본격적으로 설립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