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무안군 하의도의 전답은 입도조(入島祖) 농민들의 노동력에 의해 개간되었으나 1600년대 초 정명공주방(貞明公主房)으로 절수되고 징세 기한이 지난 뒤에도 결세 납부를 강요하여 농민은 궁방과 도지부에 이중 결세를 납부하였다. 1907~1908년 역둔토 조사 사업 당시 제실유 및 국유재산조사국은 하의도를 홍씨가[정명공주의 시가]의 사유지로 사정했다. 이에 대해 농민들은 1909년 홍씨가의 도조 징수에 저항하며 경성고등공소법원에 부당이득 반환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은 홍씨가에게 도조 반환을 명령했다. 일본인 지주 우콘 곤자에몽(右近權左衙門)은 홍씨가와 농민간의 분쟁을 지켜보며 1911년 토지 매수에 착수했다. 우콘의 토지는 토지조사사업을 거치면서 법률적 소유권을 확정했다.
1919년 9월 우콘은 다시 오사카(大阪)의 덕전양행(德田洋行)에게 토지를 전매한다. 덕전양행은 목포에 덕전양행 지점을 설치하고 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1922년 소작인들은 ‘하의소작인회’를 조직해 토지회수운동을 전개했으나 농장 측의 탄압과 회유로 실패했다.
토지회수운동은 1924년 1월 다시 덕전양행으로부터 농지를 유상 구입하는 형태로 재현되었다. 덕전양행은 부산 거주 김국태에게 토지를 매도할 예정이었지만, 농민 대표들은 22만원에 토지를 농민에게 유상 반환할 것을 요구하고 1924년 4월 도민대회를 열어 토지 유상 구입을 위한 4개조 결의문을 가결했다. 그러나 농민들의 요구는 농장 측의 탄압과 회유로 좌절되었다.
1927년 1월 30일, 오사카에 거주하고 있던 최용도(崔龍道), 고장명(高長明) 등 하의도 출신 노동자 약 60여 명은 ‘하의노동청년회’를 조직하고, 같은 해 6월에는 일본노동농민당 오사카 지부의 집행위원인 아사히 겐즈이(朝日見瑞)에게 하의도농민조합의 조직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일본노동농민당은 동년 9월에 최용도를, 그리고 10월에는 강성사(姜誠思)와 김병안(金炳安)을 특파하여 농민조합을 결성했으나 농장과 관헌의 방해 때문에 실패했다.
한편 농장 측은 1927년도의 소작료 징수 시 2회에 걸친 강제 차압을 단행했는데, 이를 계기로 다시 하의도농민조합을 조직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의도에 귀향한 최용도는 고장명과 아사히 겐즈이 등에게 조합 조직을 위한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따라 12월 27일에는 아사히가 농민조합 특별활동위원으로, 이로가와 다로(色川太郞)는 조합 고문으로, 니시나 유이치(仁科雄一)가 조합 상무위원으로서 하의도에 도착했다. 1928년 1월 2일 최용도 외 약 300여 명은 “앞으로 일치단결하여 조선무산계급의 모든 운동과 결합하고 전 세계 무산계급의 절대적인 응원 하에 탐욕스러운 지주의 압박과 관헌의 간섭을 용감하게 돌파하고 열악한 소작제도로부터 해방되어 광명의 큰길로 나아가기 위해 전진하자”고 선언하며 하의도농민조합 발대식을 개최했다.
하의도농민조합의 조직은 집행위원회와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 구호부, 농사부, 교육부, 조사부, 외교부, 선전부, 부인부, 회계부 등이 설치되었다. 집행위원장은 장정태(張正泰), 선전부장은 최용환(崔龍煥), 교육부장은 고장명, 집행위원은 변인옥(卞仁玉), 공유범(孔有凡), 최용도 등이 선출되었다. 조합원은 약 800여 명에 달했다.
조합 강령으로는 단결을 통한 생활개선, 합리적인 소작 조건의 획득, 토지 개량, 농업기술과 농업 경영 방법의 개선, 조합의 조직과 활동에 의한 농민의 문화적 생활의 완성을 내걸었고, 농장 측에게는 경작지 재측량 실시, 생산고 결정 시 소작인 대표의 참가, 불법 차압 절대 반대, 학교, 병원 등 문화적 시설의 완비, 관개 설비의 완비, 체납 소작료의 완전 면제 등을 요구했다.
1928년 2월 2일, 조합은 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덕전양행 목포 지점과 소작 문제에 관해 교섭할 것을 결의했다. 조선농민총동맹은 1928년 2월말에 총동맹의 검사위원이자 암태도 소작투쟁의 지도자였던 박복영(朴福永)을 하의도에 파견해 현지 조사를 실시하고 하의도 토지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였다. 이에 대해 농장 측은 조합 측의 요구를 전면 거부하고, 다시 조합을 강제 해산시키겠다고 위협했다. 소작인들은 농장 측 인사인 박춘금을 폭행했고,경찰은 이를 빌미로 조합 간부인 최용환, 고장명, 최용채(崔龍彩), 변인옥, 공유범, 우정륜(禹正倫), 공화범, 우정선(禹正先), 김찬배(金贊培), 최옥종(崔玉宗), 최용도를 ‘소요 및 공무 집행 방해죄’로, 아사히 겐즈이를 ‘치안 경찰법 위반죄’로 검거했다. 이후 하의도 토지회수운동은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당시 다른 지역에서는 청년 지식인들이 소작인 단체를 결성하여, 소작료 인하와 소작권의 보장, 그리고 지세 공과금의 지주 부담 등을 요구한 소작쟁의를 전국적인 범위로 전개했다. 반면 하의도농민조합에서는 소작 관행의 개선 문제보다 토지소유권의 회수를 위한 유상 구입 운동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다른 지역의 운동과의 질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하의도 토지 문제는 토지로부터 유리된 하의도 출신 노동자의 활약에 의해 조선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로까지 확대되었다. 하의도 출신의 청년 지식인층과 국외의 하의도 출신 이주민의 주도로 재개된 하의도 토지회수운동은 관헌의 철저한 탄압으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후 조합 간부의 출옥을 계기로 토지회수운동이 간헐적으로 지속되었으나, 일제의 대륙 침략 이후 파쇼 체제가 강화되어 농민들은 토지를 회수하려는 시도를 드러낼 수 없었다. 내부로 침잠해 있던 이러한 집념은 ‘해방’ 이후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서야 다시 표면화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