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소동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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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1918년 일본 전역에서 쌀값 폭등을 배경으로 일어난 민중 폭동으로, 조선의 토지개량사업 및 산미증식계획에 영향을 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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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쌀소동은 1918년 일본 전역에서 쌀값 폭등을 배경으로 일어난 민중 폭동으로, 조선의 토지개량사업 및 산미증식계획에 영향을 준 사건이다. 일본 농촌의 인구 유출과 전쟁으로 쌀 수입량이 감소하여 1918년 중반부터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쌀값이 오르자 지주와 상인이 매점매석을 하면서 가격이 치솟았고 일본의 주요 도시 369곳에서 소동이 발생하였다. 일본 본토에 수입할 쌀을 확보하기 위해 식민지 조선에서 토지개량사업을 시행하고 산미증식갱신계획을 세웠다. 조선에서는 일본 본토로 쌀을 대량 유출시켜 쌀 부족 현상이 초래되었다.

정의
1918년 일본 전역에서 쌀값 폭등을 배경으로 일어난 민중 폭동으로, 조선의 토지개량사업 및 산미증식계획에 영향을 준 사건.
개설

에도시대〔江戸時代〕 중기 이후에도 쌀값 폭등을 둘러싼 민란〔一揆〕이 발생했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에도 1890년과 1897년에 도야마현〔富山県〕을 중심으로 호쿠에츠〔北越〕 지방에서 쌀 소동이 발생했지만, 일반적으로는 쌀 소동이라면 전국적인 규모로 발생한 1918년의 사건을 말한다.

경과

1914년 제1차 대전 발발 직후 폭락한 일본의 쌀값은 다른 주변의 물가를 조금씩 상승시키면서 약 3년 반 동안 거의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1918년 중반부터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는데, 이 배경에는 일본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이 지적되고 있다. 쌀 수요는 급증했으나 농촌의 인구 유출로 생산량은 오히려 줄었다. 또 전쟁의 영향으로 쌀의 수입량이 감소한 것도 쌀값 폭등의 원인이 되었다.

쌀값이 오르면서 지주와 상인들은 쌀을 투기 수단으로 간주하여 매점매석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사태를 심각하게 여긴 나카쇼지 렌〔仲小路廉〕 농상무대신은 1917년 9월 1일에 폭리취제령(暴利取締令)을 발표하여 쌀의 매점매석을 금지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1918년 4월에 외미관리령(外米管理令)이 공포되어 미쓰이 물산과 스즈키 상점 등 지정 7개 회사에 의한 외국산 쌀의 대량 수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미가는 안정되지 않았다.

쌀값이 상승하는 가운데, 데라우치 내각은 1918년 8월 2일에 시베리아 출병을 선언했다. 이 선언은 유통업자와 상인 등이 전쟁 특수에 의한 물자 앙등을 노려 매점매석을 가속화하는 상황을 발생시켰다. 실제로 고베 미곡 시장에서 쌀값은 7월 2일에 1되 34전 3리였는데 8월 1일에 40전 5리, 8월 9일에 60전 8리로 치솟았다. 8월 10일에는 교토〔京都〕와 나고야〔名古屋〕를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쌀 소동이 발생하였다. 쌀 소동은 일본의 1도 3부 37현 중 총 369곳에서 발생했다. 참가자만 수백만 명을 넘었고, 출동한 진압 병력은 10만 명 이상이었다.

결과 및 의의

쌀 소동의 영향으로 여론은 데라우치 내각의 퇴진을 요구했고, 일본 최초의 정당 내각인 하라 다카시 내각이 탄생했다. 일본 정부는 쌀 가격의 안정을 위해서는 대량의 쌀을 일본 본토에 지속적으로 수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당시 조선에서는 3 · 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기운이 수그러들었고, 조선총독부는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토지개량사업에 나섰다.

30년 계획으로 80만 정보를 목표로 하였으며, 1920년부터 우선 15년간 2억 4,000만원의 경비를 들여 43만 정보의 토지개량에 나섰다. 이로 인해 900만 석의 쌀 증산이 계획되어 그 중 700만석을 일본 본토로 보내 일본 국내의 쌀값 하락을 도모하고, 빈곤 구제로 조선인의 독립운동 침체를 노렸다. 하지만 조선총독부의 계획은 전후 불황으로 인해 계획적인 실시가 곤란하여 실제로 이루어진 토지개량은 9만 정보에 불과했다.

1926년에 산미증식갱신계획(産米増殖更新計画)이 시작되었다. 12년 목표로 자금 2억 4,000만원을 출자해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동양척식주식회사 토지개량부를 신설하여 사업 추진에 나섰다. 그러나 세계공황에 의한 일본 정부의 자금 부족으로 사업 실행이 곤란했고, 값싼 조선 쌀의 대량 수입은 일본 본토의 농촌 경제를 무너뜨려, 1934년에 백지화되고 말았다.

조선총독부는 토지개량과 수리시설의 개선으로 조선인의 생활이 향상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소 농민들의 생활을 더욱 악화시켜 농민들을 농촌에서 이탈시키고 조선의 농업은 더욱 피폐해졌다. 또 일본 본토로 쌀을 대량 유출시킴으로써 조선에서는 쌀 부족 현상이 초래되어 조선총독부는 분노와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참고문헌

『所謂米騒動事件の研究』(社会問題資料研究会, 東洋文化社, 1974)
『米騒動五十年』(労働運動史研究会編, 労働旬報社, 1968)
『米騒動の研究』1~5(井上清·渡部徹 共編, 東京: 有斐閣, 1959~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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