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본불교는 붓다의 교설과 그 제자들의 교설을 근본으로 삼는 불교 운동이다. 초기불교, 원시불교라고도 한다. 근본불교는 붓다와 붓다의 직제자 시대의 불교이다. 초기 경전인 빨리어 삼장(tipi?aka)과 한역 율장과 아함경에 나타난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부파불교 시대에 그 형태가 완성된 것으로서 초기적인 형태의 붓다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근본불교란 지극히 관념적인 용어로서 명확한 실체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부파불교적 시각이 반영된 초기 경전을 서구의 문헌학적 방법을 통해 복원한 근대 불교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근본불교(Fundamental Buddhism)는 원시불교(Primitive Buddhism) 혹은 초기불교(Early Buddhism)라고도 하는데, 한국에서는 이 중 근본불교라는 용어가 선호된다. 원시불교란 용어는 붓다와 붓다의 직제자 시대의 불교가 아직까지 완전한 모습을 갖추지 못한 원시적인 형태의 불교로 비춰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호되지 않고 있다. 초기불교란 용어는 인도 동부 겐지즈강 중하류 지방에서 발전하여 인도 전역으로 퍼져나간 초기형태의 불교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근본불교와 부파불교를 일부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불교에서는 붓다의 본래적 가르침이 부파불교(Sectarian Buddhism) 시대에 왜곡되어 소승불교(Hīnayāna Buddhism)로 전락했으며, 붓다의 근원적인 가르침은 대승불교 시대에 이르러 다시 살아났다고 믿고 있다. 따라서 대승불교(Mahāyāna Buddhism)를 표방하는 한국 불교 전통에서 부파불교의 일부를 포함하는 초기불교란 용어가 선호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부파불교와 구분되는 근본불교에 대해서 우리가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 하는 점은 진지하게 고민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근본불교는 붓다와 붓다의 직제자 시대의 불교로서 초기경전인 빨리어 삼장(tipiṭaka)과 한역 율장과 아함경에 나타난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부파불교 시대에 그 형태가 완성된 것으로서 비록 초기적인 형태의 붓다의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 있어서 각각의 경전이 속한 부파불교 교단의 입장을 대변하는 형태로 발전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빨리어 삼장에 전해진 붓다와 붓다의 직제자들의 모습에는 남방 태라와다(Theravāda) 교단이 선호하는 모습이 담겨 있고, 한역 『장아함경』과 『중아함경』에는 북서인도 법장부(dharmaguptakas)의 관점이, 그리고 『잡아함경』에는 북서인도 설일체유부(Sarvāstivāda)의 관점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본불교란 지극히 관념적인 용어로서 명확한 실체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고, 부파불교적 시각이 반영된 초기경전을 서구의 문헌학적 방법을 통해 복원한 근대 불교학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는 인도동부 겐지즈강 중하류 지역의 도시화를 바탕으로 발전한 종교이다. 서기전 600~400년 사이에 겐지즈강 중하류 지역에서는 인더스 문명에 이어지는 제2의 도시화가 일어났고 상업이 발전하면서 새롭게 도시상인들이 사회의 주류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당시 겐지즈강 중하류 지역에서 성립된 출가수행자 집단의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으며, 순세외도(ājīvikas), 자이나교(Jainism), 불교(Buddhism)와 같은 신흥종교의 발전을 이끌어내게 된다. 이 시기에 힌두교의 근간이 되는 브라만교는 아직까지 인도 중북부 지방에 머물러 있었으며 점차적으로 겐지즈강 중하류 지역으로 확장되고 있었다.
당시 불교와 브라만교를 포함한 다양한 인도종교는 삶이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무수히 많은 삶의 일부라는 윤회관을 단계적으로 발전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윤회가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행위(業, karma)를 원인으로 생겨난다는 업설을 점차적으로 확립시켰다. 브리만교는 제식행위를 중심으로 업설을 정립하면서 올바른 제식행위를 매개로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제식주의적 해탈관을 발전시켰다. 한편 자이나교는 고행주의를 중심으로 행위(karma)를 영혼(jīva)을 가리고 영혼을 속박하는 물질로 보는 업설을 정립하고 극단적인 고행을 통해 행위 물질을 제거하여 윤회를 벗어날 수 있다는 고행주의적 해탈관을 발전시켰다.
불교는 인간의 윤리적 관념에 입각하여 신체적 · 언어적 행위에 선행하는 선하거나 악한 의도를 행위(karma)로 보는 업설을 정립하고 인간의 내적이고 정신적인 측면을 명상과 지혜를 통해 통제하여 끊임없는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는 불교의 열반(nirvāṇa)관을 발전시켰다. 불교의 윤리적 윤회관은 인간의 다양한 상태에 대한 인과적 설명과 함께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할 윤리적 근거를 설명하는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발전했으며 대부분의 인도종교에 영향을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인도인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근본불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설(無我說, anātman)을 통해 윤회의 주체로서 자아(ātman)를 받아들이는 브라만교와 차별화하고, 중도설에 입각한 명상수행을 통해 극단적인 고행주의를 표방했던 자이나교와 차별화하면서 독자적인 체계를 갖춘 종교로 발전하게 된다.
윤회를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생류들이 살아가게 될 무수히 많은 삶들 속에서 개개의 존재에게 자기동일성을 부여하는 원리로서 윤회의 주체를 자아(ātman)라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자아는 변하지 않는 것이고 영원한 것이며 우리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으로 브라만교를 포함한 인도종교 일반에서 간주되었다.
근본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자아는 기본적으로 이 세계의 그 어떠한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불교적 세계관에 위배되며 실체가 없는 자아에 대한 헛된 믿음은 인간의 끊임없는 욕망의 근본적인 원인으로서 우리들에게 괴로움과 집착과 만족스럽지 못함을 남길 뿐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직접지각을 통해 알아차릴 수도 없고 추론을 통해 존재를 입증할 수도 없는 단일한 자아가 있다는 믿음은 불교에서 유신견(有身見)으로 간주되었으며 우리들이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그릇된 편견으로 간주되었다.
근본불교의 이러한 입장은 무상(無常) · 고(苦) · 무아(無我)라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계를 보는 3가지 관점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들은 상호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으며 인간에게 끊임없이 생겨나는 욕망과 번뇌를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제시된다. 무상(anicca)이란 이 세계의 그 어떤 것도 영원할 수 없다는 것으로, 여기에는 붓다도 불교도 그 어떤 것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色), 느낌(受), 개념(想), 의도(行), 의식(識)의 각각도 또한 영원할 수 없다.
인간은 우리의 물질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이 영원하기를 원하지만 그 어떠한 부분도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만족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들은 기본적으로 괴로움(dukkha)일 뿐이다. 그러므로 영원하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며 괴롭고 만족스럽지 못한 상태에 있는 것은 결코 나의 것이 아니다(anatta)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와 주변과 세계를 이러한 무상 · 고 · 무아의 관점을 통해 보는 사람은 이러한 대상들에 관해 점차적으로 흥미를 잃게 될 것이고, 이러한 대상들에 대해서 욕망과 집착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리고 욕망과 집착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으로부터 모든 욕망과 집착에서 벗어나게 되고 따라서 더 이상 이 윤회하는 세계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지혜가 생기게 된다.
바로 이렇게 모든 욕망과 번뇌가 사라졌다는 지혜를 불교에서는 깨달음이라고 하고 이러한 지혜를 얻은 사람은 죽음과 함께 최종적으로 끊임없는 윤회에서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이와 같이 무상 · 고 · 무아의 관점을 통해서 매 순간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통찰하여 우리들의 욕망과 번뇌를 극복하는 수행법은 점차적으로 위빳사나(vipassana, 觀)란 이름으로 체계화 된다.
한편 이러한 지적인 측면보다 감성적인 측면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체계화된 수행법을 일반적으로 사마타(samatha, 止)라고 한다. 사마타란 정신적 활동을 단계적으로 정지시키는 것을 의미하는데, 마음을 한군데로 모으고 평정을 유지하며 궁극적으로는 정신 현상을 넘어서는 신비적인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근본불교의 사선정(四禪定)은 사마타적 측면이 강한데 초선 · 이선 · 삼선 · 사선으로 이어지면서 단계적으로 거칠고 크거나 미세한 생각을 중지시키고, 기쁜 마음을 중지시키고, 행복한 마음을 중지시키면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이렇게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의 상태는 더 이상 바람이 불지 않아서 어떠한 물결도 일어나지 않는 마치 거울과 같은 호수의 표면에 비유되며 지혜를 일으키는 든든한 토대가 되는 것으로 본다.
여기에서 작용하는 지혜를 체계화 한 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로 구성된 성인들의 4가지 진리〔四聖諦〕가 된다. 일반적으로 사성제는 단순한 목록처럼 간주되어 마치 의사가 아픈 환자에게 처방을 하는 것처럼 설명된다. 먼저 우리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질병으로 괴로움〔苦〕을 진단하고, 그 괴로움이 일어나는〔集〕 원인을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으로 분석하며, 욕망의 제어를 통해 괴로움이 소멸되어〔滅〕 치유될 수 있음을 보여준 후, 구체적인 처방으로서 8가지 올바른 길〔八正道〕을 통한 중도의 길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때 성인들의 4가지 진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수행의 관점에서 적용하면, 먼저 우리가 원하는 것과 우리가 실제 가질 수 있는 것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그 누구도 만족스러운 상태에 머무를 수 없다는 인간 괴로움의 보편성을 직면하여 알아차리고, 우리를 만족스럽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극복하여 더 이상 욕망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하여 욕망을 파괴하고, 욕망의 소멸을 통해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인간의 보편적 괴로움의 상태를 극복하여 괴로움을 파괴시키고, 욕망의 소멸을 가능하게 해 주는 8가지 올바른 길을 두루 잘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일어나는 욕망을 근본불교에서는 갈애(tṛṣṇa)라고 한다. 갈애는 비유적으로 사막을 여행하는 여행자가 1주일간 물을 전혀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 애타게 물을 찾아다니는 상태로 설명된다. 인간의 다양한 욕망을 불교에서는 번뇌라고 하며 그 중에서 가장 강하고 가장 극복하기 어려운 대표적인 번뇌를 탐욕〔貪〕과 혐오〔嗔〕와 우둔함〔恥〕으로 설명하고 있다. 불교는 우리의 우둔함을 지혜로서 극복하고 우리 주변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욕망의 대상들 사이에게 평정을 유지하여 더 이상 탐하는 마음과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음을 통해 탐욕〔貪〕과 혐오〔嗔〕와 우둔함〔恥〕으로 대표되는 모든 번뇌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번뇌를 중심으로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근본불교의 중요한 탐구주제가 되었으며 번뇌를 원인으로 괴로움이 생성되고 괴로움이 소멸되는 과정은 상세하게 분석되었고 철학적으로 체계화되었다. 일반적으로 현상들의 생성과 소멸은 의존해서 생성되는 법칙이란 의미를 가진 연기(緣起, pratītiyasamutpāda)로서 설명된다. 이는 하나의 원칙으로서 ‘A가 있음으로부터 B가 있고, A의 생성으로부터 B가 생성한다.’는 형식으로 정형화 된다.
이때 전자는 시간적 선후관계에 있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논리적이고 동시적이며 상호적인 인과관계를 의미하고, 후자는 시간적 선후관계에 있는 일반적인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전자의 경우 볏단 2개가 서로 의지하여 서있는 것에 비유되는데 한쪽 볏단이 넘어지면 다른 쪽 볏단만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서로가 상호 의존하는 인과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저울의 한쪽에 무거운 것을 올리면 한쪽이 내려감과 동시에 다른 쪽이 올라가게 되는 것으로 통해서 양자가 동시적임을 설명하기도 한다. 따라서 전자의 인과관계에 있는 양자는 서로 의존하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양자가 상생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연기(pratītiyasamutpāda)는 또한 9가지 내지 12가지의 현상들의 인과관계로 설명된다. 여기에서 12가지란 지혜롭지 못함〔無明〕, 과거의 행위〔行〕, 의식〔識〕, 신체적 정신적 현상〔名色〕, 감각적 정식적 능력〔六入〕, 접촉〔觸〕, 느낌〔受〕, 욕망〔愛〕, 집착〔取〕, 재생〔有〕, 출생〔生〕, 늙음과 죽음〔老死〕이다.
이때 지혜롭지 못함을 원인으로 인과관계의 흐름이 이어져서 늙음과 죽음이 있게 되는 과정을 우리들의 모든 괴로움의 생성〔集〕으로 보고, 지혜롭지 못함의 소멸로부터 인과관계의 흐름이 이어져서 늙음과 죽음의 소멸로 이어지는 과정을 우리들의 모든 괴로움의 소멸〔滅〕로 본다. 따라서 12연기의 생성과 소멸은 각각 성인들의 4가지 진리(四聖諦)에서 2번째 생성〔集〕과 3번째 소멸〔滅〕로 해석된다. 근본불교에서 연기는 하나의 원칙으로서 정형화되었고 12가지 현상들의 생성과 소멸로 다양하게 분석되었으며 불교의 철학적 측면을 대변하는 것으로 발전하게 된다.
근본불교에서 모든 지혜와 수행의 종착지는 열반(nirvāṇa)이다. 열반이란 윤회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서 어원적으로 불이 꺼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열반을 타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어떤 수단에 의해서 불이 꺼지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 촛불이 바람에 의해 꺼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열반은 현상적인 상태에서 잠재적인 상태로 가는 것으로서, 궁극적인 의미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한편 열반을 자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서 더 이상의 원인이 남아있지 않아서 불이 꺼지는 것으로도 볼 수 있는데, 모닥불이 밤새 타다가 더 이상 탈 수 있는 연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꺼지는 것과 같다고 한다. 그렇다면 열반은 완전한 소멸로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근본불교에서 열반에 대한 해석이 전자였는지 후자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부파불교 시대에 18개 부파가 형성되었을 때 열반을 후자와 같이 소멸로 해석하는 부파는 단 1개뿐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비록 열반이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였지만 일반 신자들에게는 너무나 먼 이상향에 불과했다. 따라서 일반 신자들은 출세간적으로 열반을 목표로 하기 보다는 세간적으로 다음 생에 좀 더 행복한 상태로 태어나는 것을 원했다. 이는 보시를 많이 하고 계율을 지키면 천상세계에 태어난다〔布施持戒生天〕는 형식으로 체계화되어 일반 재가불자들의 삶을 지배하는 규범이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