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高羽榮)은 1938년 9월 27일 만주 본계호(本溪湖)에서 태어났다. 8 · 15광복 후 부모의 고향인 기양으로 귀국한 후 1947년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였다. 2005년 향년 67세로 사망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란하여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미국 만화를 접하면서 만화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중학교 2학년이던 1953년 16쪽짜리 단행본 『쥐돌이』를 출간하였다. 서울 동성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7년에 어머니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1958년에는 두 형이 사망하였다. 둘째 형 일영이 ‘추동식’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던 우스개 만화 「짱구박사」를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연재를 이어가며 만화가의 삶을 시작하였다.
1950년대 후반 만화책을 빌려 주는 만화가게(대본소, 만화방)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눈물꽃」(1962), 「최후생명」(1962), 「쌍아루라」(1964), 「흙면제국」(1965), 「움직이는 섬」(1965), 「도술삼형제」(1969), 「첩보원 B2호」(1969) 등 다양한 장르의 어린이 만화를 출간하였다.
작품 출판 여부가 출판사에 의해 좌우되고, 팀을 꾸려 다작해야 하는 만화방 제작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하고 1967년 1월에 창간된 어린이잡지 『 어깨동무』의 초대 미술부장에 취임하였다. 이후 어린이 잡지에 역사 만화를 중심으로 주로 소년 독자들이 좋아하는 모험, 첩보 만화를 발표한다. 어린이 만화로 가장 오래 연재한 작품은 『 새소년』에 실린 「대야망」으로, 1972년 4월호에 연재하기 시작해 1977년 6월호까지 연재하였다. 극진 가라테를 창시한 최영의〔大山倍達, 1923~1994〕의 삶을 태권 마스터 최배달로 각색하였다. 펜과 붓을 능숙하게 활용하며 명암을 강조하고, 정확한 인체 데생을 바탕으로 동세를 과장되게 표현한 스타일은 격투 액션을 실감 나게 묘사하였다.
신문에 연재된 만화는 한 칸 만평, 네 칸 시사만화뿐이던 1972년 1월 1일, 『 일간스포츠』 지면 한 면을 만화로 채운 고우영의 「임꺽정」이 연재된다. 우스개보다 삶의 희로애락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어른들을 위한 만화를 ‘극화(劇畫)’라고 불리며 성인 독자들의 만화 수요를 끌어냈다.
1973년에 발표한 「수호지」는 연재 후 화려한 채색 표지에 50쪽, 사륙배판형 가판용 만화로 ‘김데스크’에서 발행되어 50만 부가 판매되는 인기를 끌었다. 이후 경쟁적으로 가판용 성인 만화 출간이 늘어나 1974년도에는 10여 종이 출간되기도 하였다. 1977년 1월 성인 만화에 퇴폐적인 내용들이 실렸다는 이유로 정부의 단속이 실시되고, 성인 만화 심의도 폐지되며 가판용 성인 만화 시장이 몰락하였다. 이후 고우영 만화는 우석출판사에서 서점용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때 신문 연재본과 달리 사전 심의에 의해 많은 부분이 수정되었다.
고우영은 1972년부터 1991년까지 18년간 『일간스포츠』 지면을 통해 「삼국지」, 「초한지」, 「서유기」 등 중국 고전과, 「가루지기」, 「놀부전」, 「바니주생전」, 「연산군」, 「박씨전」, 「통감투」, 「오백년」 등 한국의 고전을 만화로 재해석하며 당대의 여러 상황을 풍자적으로 반영하였다.
오규원은 고우영의 만화에 대해 “과거를 현실 속에서 다시 읽어내고, 그것을 통해서 희화(戱畵)된 고전을 만화로 읽는 재미 말고도 과거를 현재와 함께 바라보는 방법을 일깨워 준다.”라고 평가하였다. 1992년 만화뿐 아니라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였고, 사냥, 낚시, 암벽 등반, 스킨스쿠버, 골프 등 다양한 취미에 몰입하고 관련된 체험을 에세이나 만화로 소개하기도 하였다. 1994년에는 10권짜리 기획 단행본 《만화 십팔사략》을 발표하였다. 1996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일보』에 시사만평 「고소금」을 연재하기도 하였다.
한국만화가협회 15대, 16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사후 2008년 7월 16일부터 9월 12일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에서 ‘고우영 만화: 네버엔딩 스토리」가 개최되었다.
1998년 대한민국 출판만화대상 공로상, 2001년 제33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대중예술 부문 대통령상, 2003년 제2회 SICAF 어워드 공로상 등을 수상하였다. 2005년 은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