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 출생. 아버지는 최승현(崔承泫)이며 4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창설한 극진가라데(極眞空手)는 일본에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세계 각지로 발전하여 세계 130개국, 1200만 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에만 55개 지부, 550개 도장에 50만의 회원이 있다.
그는 가라데를 발전시켜 ‘극진가라데’라는 유형을 만들었고, 그 발전에 일생을 바쳐 ‘가라데의 대부’라는 칭호를 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그를 오야마(大山)라 칭했으나, 그는 배달민족임을 잊지 않기 위해 이름을 ‘오야마마스다츠(大山倍達)’이라고 썼다.
3살 때 만주로 건너가 누나집에서 지내면서 중국권법을 수련하여 1936년 4월 유단자가 되었다. 그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38년 3월에는 야마나시소년항공학교(山梨少年航空學校)에 입학하였고, 그 해 8월한에츠(般越義珍)의 문화에 들어가 가라데(空手)를 배웠다.
1940년 4월에는 다구쇼쿠대학(拓殖大學)에서 공수 2단을 받았고, 1945년 8월 동경에 공수도연구소를 창설하여 공수도연구에 착수하였다. 1946년 4월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체육과에 입학하였고, 1947년 9월 동경 마루야마(丸山)공회당에서 개최된 전일본공수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하였다.
1950년에는 47마리의 소와 대결하여 이겼으며, 그 중 4마리는 즉사시켜 용맹을 떨쳤다. 1952년 3월에는 Chicago공수협회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32개 소에서 시범과 공수지도를 하였다. 그는 진검승부(眞劍勝負)에서도 9차례를 우승하였으며, 1953년 4월에는 미국 시카고에서 소와 격투하여 맨손으로 뿔을 부러뜨려 위력을 과시하였고, 귀국 후에는 소와 대결하는 장면의 영화를 촬영하였다.
그는 메구로(目黑)에 있는 자기 집 아래에 오야마도장을 개설하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아 오야마의 제자가 되도록 해야한다는 신념 아래 격투형태의 가라데를 가르쳐 후일 극진가라데의 원형을 이루었다. 오야마도장은 1956년 6월 릿쿄우대학(立敎大學) 뒷편으로 이전하였다.
1958년에는 영문으로 된 가라데의 지도서인 ≪What is Karate≫를 출판하고 하와이에 지부를 개설하였으며, 워싱턴 FBI본부와 미국육군사관학교(West Point)에서 가라데를 지도하였다.
1959년 7월 하와이에서 제1회 하와이공수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고, 1960년 미국과 유럽 등 16개 국 72개 지부도장을 발족시켰다. 그리고 196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로스엔젤레스에 도장을 개설하고, 하와이에서 제1회 북미공수도선수권대회를 개최하였다.
1962년 11월 외국인 유단자 20명을 배출하였으며, 1963년 10월 국제공수도연맹극진회관을 결성하고 도장건설에 착수하였다. 1964년 4월 오야마총재의 요청에 따라 사토(佐藤榮作, 후일 총리대신)회장과 모리(毛利松平, 후일 국무대신)부회장의 취임식이 있었고, 같은 해 6월에는 극진회관총본부를 준공하고 국제공수도연맹극진회관을 정식으로 발족시켰다.
1965년 캐나다지부, 1966년 북미연맹과 남미연맹, 1968년 유럽연맹, 중근동(中近東)연맹, 남태평양연맹, 1969년 남아프리카연맹, 동남아시아연맹 등 조직을 확대하였다. 1969년 9월에는 제1회 전일본공수도선수권대회를 동경체육관에서 개최하였다.
특히 이 대회는 가라데 이외에 유도, 킥복싱 등 다른 종목의 격투기선수들이 참가하여 직접타격제(直接打擊制)의 성격을 지닌 최초의 대회가 되었다. 그의 직접타격제 가라데는 격투기의 역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여 그 뒤 격투기붐을 일으켰다.
그로 말미암아 극진회관이 융성하게 되었으며, 그 뒤 가라데올림픽이라 불리는 세계대회를 개최하여 해외조직의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1971년 6월 뉴욕 맨하탄에 미국본부도장을 개설하고 세계 각지구연맹장을 임명하여 세계조직의 기반을 확립하였다.
1975년 11월 제1회 오픈토너먼트 전세계공수도선수권대회를 동경체육관에서 개최하였는데 36개 국 128명의 선수가 출전하였다. 제2회 대회는 1979년 11월에 일본 무도관에서 개최하였는데 45개 국 150여 명의 선수가 참가하였고, 관중도 3만 2000명이나 되었다.
그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걸쳐 후진양성과 전세계의 가라데 보급을 통한 기반구축에 주력했고, 1980년대에는 이러한 사업에서 한걸음 나아가 각종 대회의 참가와 기록영화촬영, 서적출판, 강연 등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극진회관 10년 역사를 뒤돌아보고 양적인 발전과 더불어 질적인 발전에 주력하도록 하였다.
바쁜 가운데도 일본과 세계 각국의 선수권대회에 출석하여 조직을 확대하는 한편, 가라데를 무도정신에 입각하여 수련하도록 강조하고 많은 인사들에게 극진가라데를 이해시키는데 주력하였다.
그 동안 가라데실기 뿐만 아니라 이론적 뒷받침을 위해 저술활동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는데 1958년에 지은 ≪What is Karate≫를 시초로 ≪백만인의 공수≫ · ≪비전극진공수≫ · ≪극진가라데연감≫ 등 저서와 편저, 감수가 70여 권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