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남도 대동 출생. 1938년 평양광성고등보통학교(光成高等普通學校)를 거쳐, 1940년 경성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하 였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육상선수로 활약하였다.
광성고등보통학교 재학 때인 1936년에 제3회 전조선중등학교 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저장애(低障碍)와 높이뛰기 우승, 세단뛰기 2위, 1937년 제4회 전조선중등학교 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 고장애와 세단뛰기 우승, 높이뛰기 2위, 그리고 1937년 제3회 전조선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서는 세단뛰기에 우승하는 등 광성고등보통학교의 전국 제패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또한 경성사범학교 재학중이던 1939년에는 제25회 전일본중등학교 육상경기선수권대회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하여 높이뛰기와 세단뛰기 우승, 고장애 2위, 멀리뛰기 5위 등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하여 한민족의 우수성을 자랑하였다.
1940년 3월부터 경상북도의 예안심상소학교(禮安尋常小學校)를 시작으로 평양 서성공립국민학교와 신양공립국민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다. 광복 후인 1946년 8월, 30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체육학과에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한 뒤 선린상업고등학교(善隣商業高等學校:지금의 선린정보산업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3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조교로 재직하였으며, 1955년 인하대학교 공과대학 전임강사를 거쳐, 1956년부터 1981년까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이해 8월 31일 정년을 맞아 퇴임을 하였다. 정년퇴임 후에도 명예교수로 평생을 학문연구와 육상경기 발전, 그리고 체육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진력하였다.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1974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체육사연구」라는 논문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아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체육인의 대표적인 인물로 인정받았다.
1962년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4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육상코치로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대한육상경기연맹 이사, 기술지도위원회 및 선수강화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육상경기 발전에 기여하였고, 대한체육회 선수강화위원회 및 훈련평가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학자로서 우리나라 체육사를 정립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인 결과, 많은 논문과 저서를 남겼다.
저서로는 1958년에 출간된 『한국스포츠사』를 비롯하여 『한국체육사』(1963)·『육상경기』(1968)·『한국학교체육제도사』(1970)·『세계체육사개론』(1976)·『유천논설집』(1976) 등이 있으며,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한국 手搏·柔道에 대한 사적 고찰」(1961)·「훈련도감 설치연대에 대한 소고」(1962)·「한국축국·격구고(韓國蹴鞠·擊毬攷)」(1969) ·「한국 각저고(韓國角觝攷)」(1972) 등이 있다.
한국의 체육사 연구는 광복 이후 1958년 그의 저서 『한국스포츠사』 출판을 기점으로 독자적인 모습을 띄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연구 업적으로 1967년 대한민국 체육상(연구 부문)을 받았다. 그 밖에 중화민국체육학회 고문, 국제보건체육학회(ICHPER)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등 우리나라 체육을 해외에 홍보하는 데 기여하였다.
체육교육 분야에서는 문교부(현 교육부) 장학위원회 위원, 교원자격심사위원회 위원, 교육과정심의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보면서 우리나라 체육교육의 목표 설정과 방향정립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공적으로 정부로부터 1963년에 문화포장, 1981년에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