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로철광의 범위에 포함되는 유적으로, 시굴조사를 통해 조선시대 제철로 4기와 방화장(防火墻) 1기가 확인되었다. 노 벽체편 · 철괴 · 철재 · 자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된 철재 · 철괴 등을 금속분석한 결과 사철(砂鐵)을 제련해 단조철기 제작용 괴련철(塊鍊鐵)을 생산했던 유적으로 판명되었다. 야로(冶爐)라는 지명은 ‘쇠를 다루다’라는 뜻의 ‘야(冶)’와 ‘가마’를 의미하는 ‘노(爐)’가 합쳐진 것으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등의 조선시대 문헌기록에 야로현에서 사철이 나며 심묘리(心妙里)에 철장(鐵場)이 있어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해 중앙정부에 세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지리지에 의하면 야로는 신라 강주(康州) 고령군(高靈郡) 영현(領縣)의 하나로, 본래 적화현(赤火縣)이었는데 경덕왕이 야로현으로 고쳤으며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 · 가야면 일대에 해당된다. 1452년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야로현의 토산이 사철이고, 남쪽 심묘리(心妙里)에 철장이 있어 9,500근의 철을 세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1496년 간행된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誌)』 고령군조에도 심묘리에서 중품의 사철 500근을 세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의 기록들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 『여지도서(輿地圖書)』 ·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심묘리(心妙里・深妙里)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기록이 있다.
미숭산 남서쪽 지봉인 관모봉(410.8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사면 및 ‘등골’이라는 골짜기에 위치한다. 주변에는 고령 용리유적 · 산주리유적 · 사리유적 등의 제철유적이 분포한다. 합천군의 의뢰로 2004년 8월 16일부터 동년 9월 9일까지 경남고고학연구소(현, 삼강문화재연구원)에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제철로 4기와 방화장(防火墻) 1기가 확인되었으며, 노 벽체편 · 철괴 · 철재 · 자기편 등이 출토되었다. 제철로 유구는 평면형태가 방형 · 타원형 · 부정형 등으로 다양하고 목탄이 분포하고 있었으며, 일정범위가 불을 맞아 적갈색으로 소토화되었고 피열된 석재가 확인되었다. 노가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다른 곳보다 더 강하게 열을 받았고 10~15㎝ 크기의 석재가 둥글게 돌아가거나 주변에서 다수의 노 벽체편과 철괴류 및 철재가 출토되었다. 아마도 노는 지름 1m 정도의 원형 혹은 타원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유물 중 노내재 2점 · 노내철괴 1점 · 유출재 2점 · 노벽편 2점 등 7점에 대해 금속분석을 실시한 결과, 노내재의 이산화티탄(TiO₂) 함유량이 5.0~10.5%에 달하고 노내철괴에는 뷔스타이트(Wüstite)와 슬래그(Slag)상이 형성되어 있어 사철을 원료로 해 괴련철을 생산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삼국통일신라시대 고대 원통형 제련로에서 철광석을 제련하였고, 고려조선시대에는 여기에 더해 상형로 · 석축형제철로에서 사철 · 토철을 제련하였다. 야로리제철유적은 수원 망포동 · 고령 용리 · 김제 은곡리 등의 유적과 함께 사철을 제련했던 몇 안 되는 유적이다.
합천야로리제철유적은 문헌기록 및 고고유적에서 철을 생산했던 곳임이 분명하게 나타나며, 유적을 포함하는 야로광산 일대에는 대가야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제철유적이 분포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적에서는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해 중앙정부는 물론 주변지역에 공급하였으며, 울산 · 충주와 함께 조선시대 대규모 철산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