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성의 기혼 여성으로, 남편의 가정 폭력으로 부상을 입고 1893년 보구여관에 환자로 입원하였다. 회복한 후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지만, 남편과 두 자녀가 모두 사라져서 보구여관으로 돌아와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이후 김마르다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보구여관에서 세탁과 요리 등의 허드렛일을 하며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기독교 전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점차 필요한 내용을 배워 환자 간호를 하게 되었다. 처음 야간 간호 업무가 주어졌을 때 건강을 상할 정도로 열심히 했다고 한다.
1903년 한국 최초의 간호학교로 설립된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서 간호 교육을 받을 여성을 모집하였는데, 지원자가 없어 김마르다 등 보구여관에서 일하던 여성이 입학하였다. 김마르다는 양복과 한복의 혼합 형태인 제복을 입고 환자를 돌보며 공부하였다. 보구여관의 간호 교육은 유일한 졸업 간호사이자 간호학교장인 선교 간호사 에드먼즈(Edmunds)가 선교 의사, 일반 선교사 등의 도움을 받아 이끌어 갔다. 12시간씩 주야간 교대 근무를 하며 저녁에 강의를 듣는 고된 일정이었다.
1906년에는 3년 교육 이수를 기념하는 예식을 하고 흰 모자를 착용하였다. 경운궁 화재가 발생했을 때는 환자를 대피시키고, 대한제국 군대 해산 때는 남성 군인을 간호하는 등의 일을 겪으며 간호사로 성장하였다. 함께 입학한 이그레이스와 함께 6년간의 간호 교육 과정을 마치고 1908년 11월 5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간호 학생일 때부터 후배 간호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졸업 이후에는 보구여관, 평양 광혜여원,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졸업 간호사로 일하면서 후배를 교육하였다. 간호 학생 교육에 한국 최초로 출판된 간호학 서적인 『간호교과서』[상권 1908년, 하권 1910년]를 활용하였다. 1910년 조직된 세브란스병원간호원회, 1911년 조직된 세브란스병원 간호원양성소 동문회에 참여하였다. 간호사로 일하면서 지속적으로 기독교 전도를 위한 가정 방문 등에 참여하였다.
1911년 김마르다 등 선교계 간호학교를 졸업한 7명의 간호사가 간호계의 지도자인 이사벨 햄튼 롭(Isabel Hampton Robb)에 대한 조사를 하여 『미국간호지[American Journal of Nursing]』에 실었다. 1912년에는 이그레이스, 김배세 등과 환자를 위한 한국 음식을 연구하여 세브란스병원간호원회에 발표하였다. 이 연구는 1913년 한국의료협회 제3차 연례보고서에 수록되고, 이후 팜플렛으로 발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