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그레이스는 1908년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학교인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를 제1회로 졸업한 간호사이다. 주인집에서 버려진 사노비 출신으로, 보구여관에서 치료받은 뒤 그곳에서 일하며 학교에 다녔다. 1903년 보구여관에 마가렛 에드먼즈가 부임하여 간호원양성소를 시작할 때 제1회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졸업 후 평양 광혜여원에서 마취 간호사이자 수간호사로 활동하였다. 1914년에는 의생 면허를 받아 독립적인 진료와 처치 활동을 하였다. 1930년대에 수원에서 의원을 개원하고 활동하다가 1947년 사망하였다.
1883년생이며, 본명은 이복업, 호적명은 이구례이다.
어느 집안의 사노비였다. 건강이 나빠 주인집에서 버려지자, 사람들이 여성 전문 선교병원인 보구여관에 데려가 치료받게 해주었다. 다리에서 괴사된 부분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고 장기간에 걸쳐 건강을 회복하였다. 기독교 세례를 받고 이그레이스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선교사들에게 승낙을 받고 보구여관에서 일하며 학교에 다녔다. 보구여관에서 간호와 진료 보조 등을 담당하던 여메례로부터 투약, 체온 측정 등의 간호 업무를 교육받고 일하기 시작하였다.
1903년 보구여관에 마가렛 에드먼즈[Edmunds, M.]가 부임하여 간호원양성소를 시작할 때 제1회 학생으로 입학하였다. 1906년 1월 25일, 3년 교육 과정 이수 기념식인 가관식(加冠式)이 우리나라 최초로 열렸고, 간호사의 상징인 흰 모자를 쓰게 되었다. 이그레이스는 이론과 실습에서 뛰어난 학업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보구여관과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장 간호 업무를 집중적으로 교육받았다. 재학 중 보구여관에 이웃한 경운궁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환자를 대피시키고,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에 저항하다 부상당한 군인을 간호하며 간호사로서의 직업의식과 전문성을 갖추어 갔다.
한편, 수원의 감리교 전도사였던 이하영으로부터 청혼을 받았는데, 나머지 학업을 계속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1907년 보구여관의 두 번째 예모식, 즉 제2회 가관식을 마친 후에 그 자리에서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하였다. 1908년 11월 5일 같이 입학한 김마르다와 함께 제1회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평양 광혜여원의 유일한 한국인 졸업 간호사로 부임하여 마취 간호사이자 수간호사로 활동하였다. 광혜여원에서 일하면서 평양 자혜의원 산과를 이수하고, 1914년 이구례라는 이름으로 제2,905호 의생 면허를 받았다. 의생 면허를 받은 후에는 별도로 외래를 보고 왕진을 다니는 등 광혜여원의 서양인 선교 여의사와 상당히 동등한 역할을 하였다.
남편 이하영이 1917년 평안남도 진남포 신흥리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광혜여원을 떠나 진남포로 이주하였다. 1919년 이하영은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 일로 그는 담임목사가 되지 못하고 주1으로 지목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그레이스는 평양 광혜여원에서 일하며 4남 2녀를 부양하였고, 이하영이 1931년 은퇴하자 함께 수원으로 가서 의원을 내고 활동하였다. 1947년 1월 10일 사망하였다.
1911년 보구여관과 세브란스병원 간호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세브란스병원간호원회 회원으로 이사벨 햄튼 롭(Isabel Hampton Robb) 간호원에 대한 조사를 하여 『미국간호지[American Journal of Nursing]』에 실었다. 1913년에는 환자를 위한 한국 음식을 발표하여 한국의료협회 연례보고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