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강제동원은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침략전쟁 수행을 위해 관계 법령에 따라 일본 본토와 식민지 및 점령지 등에서 실시한 인적·물적·자금동원 가운데 조선인을 대상으로 했던 인력동원이다. 조선인 강제동원은 일본 국가권력이 공권력을 동원해 수행한 공식 행위였으므로 행정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피해 유형에는 노무자, 군인, 군무원, ‘위안부’[일본군위안부, 노무위안부] 등이 있다. ‘위안부’를 제외한 피해 현황은 연인원 7,804,376명이며, 한반도 외로 동원되어 사망, 행방불명된 인원은 약 27만 명으로 추산된다.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년]을 치렀다. 1937년에 시작된 중일전쟁이 장기화되자, 인력과 군수물자 공급을 위한 통제와 동원을 목적으로 1938년 4월 1일, 「국가총동원법」[법률 제55호. 5월 5일 시행]을 공포하고, 이를 근거로 일본 본토와 식민지, 점령지에 국가총동원정책을 실시했다.
「국가총동원법」이 규정한 동원 대상은 ‘제국 신민, 제국 법인, 기타 단체’였다. 적용 지역은 ‘일본과 조선, 대만, 남양청(南洋廳), 관동청’ 등 1938년 당시 일본이 점령하거나 식민지로 삼은 모든 지역이었다.
「국가총동원법」은 전시수권법이었으나 법조문만으로 동원할 수 없었으므로 5월부터 「국가총동원법」을 모법으로 하는 각종 시행 법령을 칙령(勅令)과 각령(閣令), 성령(省令), 고시(告示) 등의 형식으로 제정 공포해 효력을 갖도록 했다. 대표적인 법령은 「국가총동원법」 제4조 · 제5조 · 제6조에 근거해 제정 · 시행된 「국민징용령」, 「국민근로보국협력령」, 「선원징용령」, 「의료관계자징용령」, 「국민근로동원령」 등이었으며, 일본에서 제정된 후에 조선에도 시행 적용되었다.
피해 유형은 노무자, 군인, 군무원, ‘위안부’[일본군위안부, 노무 또는 기업위안부]로 나눌 수 있다. 당시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한 통계를 통해 연인원 7,804,376명을 동원했음을 알 수 있으나 일본군‘위안부’피해의 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동원된 조선인 가운데 한반도 외로 동원되어 현지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규모는 약 27만 명으로 추산되지만, 한반도에 동원되었다가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규모는 알 수 없다.
조선인 강제동원에 대해 당시 일본 당국은 ‘공출’이나 ‘징발’ ‘징집’ 등의 용어를 사용했고, 민간에서는 피해 유형과 무관하게 ‘징용’이나 ‘강제징용’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강제동원의 유형을 노무동원, 병력동원, 군무원, 일본군 ‘위안부’로 나누어 상술하면 다음과 같다.
노무동원은 국가총동원법과 관련 법령에 근거해 정책적 · 조직적 · 집단적 · 폭력적으로 동원한 각종 산업의 노무자를 의미한다. 일본 정부 기관, 조선총독부, 남양청 등 통치기관이 행정체계를 갖추고 조직적으로 동원했다.
동원된 지역은 한반도 · 일본 · 중국 관내 및 만주 · 남사할린 · 동남아시아 · 중서부태평양 · 대만이었다. 직종별로는 군수공장 · 군공사장 · 토목건축현장 · 석탄광산 · 금속광산 · 항만운수관계 · 집단농장 등으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직종에서는 석탄광산이 가장 많았고, 동원 지역은 한반도와 일본이 다수를 차지했다.
동원 지역별로 동원 시기는 차이가 있는데, 한반도는 「국가총동원법」 발효 직후부터, 중서부태평양 · 남사할린은 1939년 2월부터, 일본은 1939년 7월 28일, 내무성과 후생성이 발표한 통첩 「조선인 노무자 내지(內地) 이주에 관한 건」을 근거로 1939년 9월부터 실시했다. 일본 당국은 연합군의 해상 봉쇄로 노무자 송출이 불가능해진 1945년 4월까지 한반도 밖으로 조선인을 송출했다.
일본은 노무동원 실시에 앞서 노동력의 양과 질, 소재에 관한 실태 파악을 위해 각종 직업능력 조사를 실시했다. 일본이 실시한 노무동원 방식을 시기적으로 보면, 관모집[전시모집 또는 할당모집], 국민징용, 관알선 등 세 가지였다. 당국은 이를 ‘동원 경로’라고 했다.
세 가지 동원 경로의 공통 사항은 모두 조선인을 필요로 하는 고용주[일본 기업]가 신청한 인원수를 일본 정부가 조정 · 배당하고, 조선총독부와 조정을 거쳐 확정하는 방식으로써 국가권력이 강제력을 발동해 동원한 후 수탈했다는 점이다. 동원 규모는 국민징용이 526,041명, 관모집과 관알선 7,008,388명 등 총 7,534,429명[중복 인원 포함]이다.
세 가지 동원 경로의 차이는 강제성의 강화 여부가 아니라 동원 과정 및 사고나 사망에 대한 책임을 국가가 지느냐 여부의 문제였다. 국민징용[conscription]은 정부가 사고나 사망 부조금을 지급하도록 했고, 식량이나 수송 과정에 필요한 비용을 부담하는 등 정부가 책임지는 동원 방법이므로 징병[conscription]과 동일한 개념이다.
이에 비해 관모집과 관알선은 사고나 사망에 대한 부조금을 기업이 해결하도록 하며,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 동원 방법이었다. 관모집을 적용할 경우, 일본 정부는 기업의 노무자 착취를 방임했고, 우선 수매 방식을 통해 기업의 이익을 보장했다. 기업은 노무자를 부려 생산량을 높일수록 정부에서 받는 돈이 늘어나 이득이 커지므로 당연히 착취가 발생하여 노무자들의 불만이 높아졌고, 사고가 자주 일어나 사망자가 속출했다. 노무자들의 불만이 고향에 알려지자 민심이 흉흉해져서 다수가 달아났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일본 당국은 관알선으로 바꾸어 수송 과정에서 탈출을 방지하고 대량 수송문제를 개선하기로 했으나 탈출은 오히려 늘어났다. 전쟁 상황이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생산성을 높이고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확대 적용한 것이 국민징용제도였다.
일본 당국은 세 가지 경로의 동원 방식을 시행하기 위해 중앙과 지방에 각각 노무동원 업무를 담당하는 행정 부서를 설치했다. 이 가운데 노무 동원 송출 관련 업무를 전담한 중앙 행정기구는, 1939년 2월 내무국 사회과 노무계, 1941년 3월 내무국 노무과, 1941년 11월 후생국 노무과, 1942년 11월 사정국 노무과, 1943년 12월 광공국 노무과, 1944년 10월 광공국 근로조정과, 광공국 근로동원과, 광공국 근로지도과, 근로동원본부, 1945년 1월 광공국 근로부 조정과, 광공국 근로부 동원과, 광공국 근로부 지도과, 1945년 4월 광공국 동원과, 광공국 근로부 근로제1과, 광공국 근로부 근로제2과로 변천되었다. 지방의 경우에는 도 단위에서 지사관방, 내무부, 광공부가 관련 업무를 담당했고, 그 이하 행정 조직인 부와 군, 도(島)의 노무 관련 업무 담당 부서는 서무과와 내무과, 그 하위의 서무계와 내무계였다. 읍과 면에서는 노무계, 병사계, 권업계, 서무계, 사회계 등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관모집[1938년 5월~1945년 4월]은 조선총독부가 노무자의 모집대상지역과 인원을 결정해 인허하고, 해당 지역의 행정기관[군청, 경찰서, 소방서 등]이 기업 담당자와 함께 노무자를 송출하는 방식이었다. 지역과 지역별 동원 인원을 할당한다는 의미에서 ‘할당모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수송책임은 행정기관과 해당 기업이 함께 담당했다.
국민징용[1939년 10월~1945년 4월]은 일본 정부가 노무자 선정에서 수송은 물론, 식량 조달과 인력 관리 등을 직접 담당하는 체제로 이루어졌으며, 수송책임은 행정기관이 전담했다. 국민징용은 크게 ‘신규징용’과 ‘현원징용’으로 구분했고, 신규징용은 다시 ‘특수징용’과 ‘일반징용’으로 구분했다. 제정 당시인 1939년에는 기술직 중심으로 제한적으로 운용했으나 전황(戰況)의 악화에 따라 확대했다.
1940년 10월에는 제1차 개정[칙령 제674호]을 통해 기존의 특수징용에 현원징용을 추가하기 시작했다. 1943년 7월애눈 제3차 개정[칙령 제600호]을 통해 응징사(應徵士) 제도를 운영하면서 징용대상자를 확대했다. 1944년 2월의 제4차 개정[칙령 제89호] 이후에는 현원징용의 확대와 함께 대대적인 일반징용을 발동했다. 조선인은 1941년부터 징용영장을 받고 동원되기 시작했다. 1944년에 가장 많은 규모를 기록했으며, 한반도에 303,824명, 일본에 222,082명, 남양에 135명이 동원되었다.
관알선[1942년 2월~1945년 4월까지]은 조선총독부가 작성 · 결정한 「조선인 내지이입 알선요강」에 의해 실시한 동원 방식으로, 조선총독부 및 지방행정기관과 경찰 관헌, 조선노무협회, 직업소개소 등이 협력해 노무자를 선정한 후 송출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수송책임도 행정기관, 기업, 조선노무협회 등이 공동으로 담당했다.
병력동원은 「국가총동원법」, 「육군특별지원병령」, 「병역법」 등 일본 정부의 법령에 의해 영장을 받고 일본군에 동원된 인력으로, 지원병과 징병으로 대별된다. 일본 정부는 중일전쟁 발발 이전부터 병력 부족을 예상하고, 조선인을 군인으로 동원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예견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와 군부는 의견 차이를 보였다. 일본 정부는 조선 청년의 징병이 불가피하다고 예상하고 황민화교육의 강화와 교육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한 데 반해 군부는 ‘조선인이 우리 등 뒤에서 총을 겨누게 하려는 것이냐’하는 반응을 보였다.
중일전쟁 발발 후 전선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조선인의 징발이 불가피해졌으나 조선의 행정체계 미비와 조선인의 정치적 권리 요구 예상 등으로 인해 대규모 인원의 징병을 실시하기 전 단계로, 지원병 제도를 실시했다. 지원병은 육군특별지원병 · 해군특별지원병과 학도지원병으로 대별된다.
일본 정부 통계에서 일본군이 된 조선인은 총 209,279명이다. 그러나 일본 후생성의 확인에 따르면, 패전 직후 일본의 군 관련 기록 말살이나 병적(兵籍) 관리의 부실로 인해 입대 관련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조선인들이 다수 존재하므로 학계에서는 약 40만 명으로 추산한다. 조선 병사들은 ‘조선군[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에 배속되어 조선에 주둔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중국과 동남아‧태평양 전선에서 목숨을 잃기도 했다.
군인동원과 관련해 중앙행정기구는 동원을 위한 훈련 기구・조직을 운영했고, 직접 동원은 지방행정 단위의 몫이었다. 중앙행정기구에서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훈련소, 조선총독부 해군병지원자훈련소는 지원병 관련 훈련기관이었고, 조선청년특별연성소, 조선총독부 군무예비훈련소는 징병 관련 훈련기관이었다.
구분 | 1938년 | 1939년 | 1942년 | 1943년 | 194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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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인 동원 기관 |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 훈련소(지원병) |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 훈련소(지원병) |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 훈련소(지원병) 조선청년 특별연성소(징병) |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 훈련소(지원병) 조선청년 특별연성소(징병) 조선총독부 해군병지원자 훈련소(지원병) |
조선총독부 육군병지원자 훈련소(지원병) 조선청년 특별연성소(징병) 조선총독부 군무예비훈련소(징병) |
지방행정조직의 경우, 도 단위에서는 내무부 · 광공부 · 경찰부가, 도 이하 단위에서는 호적계나 병사계, 호적병사계가 담당했다.
군무원은 군(軍)에서 근무하는 민간인을 의미하는 현대 용어이다. 당시 법률상 용어는 군속(軍屬)이었다. 군무원의 동원 경로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해군징용공원규칙」, 「국민징용령」, 「육군군속선원취급요령」 등 각종 법령에 따른 동원 방식이었다. 두 번째는 현지 지휘관의 판단에 따른 차출과 신분을 전환하는 방식이었다. 주로 상황이 급박한 전선에서 적용했다. 세 번째는 포로감시원과 같은 모집 방식이었다.
맡은 역할에 따라 군무원을 크게 군노무자[군에 소속된 노무자]와 군요원(軍要員)으로 나눌 수 있다. 군무원 가운데 다수는 군부(軍夫)나 고원(雇員), 용인(傭人)이라 불린 군노무자였고, 여성과 소녀도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군이 운영하는 비행장, 도크공사장 등 공사장이나 무기공장[육군조병창, 해군공창]에서 일했다. 군무원 가운데 군노무자 동원 관련 행정기구는 중앙과 지방 모두 노무동원 관련 행정기구가 담당했다.
군요원으로는 문관, 운전수, 간호부, 포로감시원 등이 있었고, 다수는 포로감시원이었다. 포로감시원은 태평양전쟁 개전 직후 급증한 연합군 포로 261,000여 명을 관리하기 위해 일본 육군이 1942년 6월, 포로수용소 설치를 결정한 후 동원한 군요원이었다. 8월에 조선과 대만인을 동원했는데 조선인은 3,223명이었다. 이들은 부산의 임시군속교육대에서 2개월간 사격과 총검술 등 군사훈련을 받은 후 한반도 · 인도네시아 · 필리핀 · 뉴기니 · 미얀마 · 태국 등 포로수용소의 말단 실무자로 동원되었다. 계약기간은 2년이었으나 기간이 만료된 이후에도 귀국할 수 없었고, 급료도 초기에 지급받았다가 중단되었다.
군무원들은 일본 패전 후 연합군에 의해 포로에 대한 가혹행위 혐의로 전범으로 기소되어 네덜란드와 싱가포르, 보르네오 등지에서 재판받았다. 조선 청년들은 변호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일본 당국의 철저한 책임 회피와 식민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재판부의 결정으로 20명이 처형되었다.
일본군‘위안부’는 일본이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 이후 1945년까지 전쟁의 효율적 수행이라는 명목 아래 일본군의 성병 예방이나 군기 누설 방지, 현지 여성 강간 방지 등을 목적으로 설치한 ‘위안소’에 동원되어 일본군의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여성을 의미한다. 일본은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이 배치된 모든 지역에 위안소를 운영했다. 일본군‘위안부’ 외에 탄광과 군공사장 등지에 동원한 노무‘위안부’[또는 기업‘위안부’]도 있었다.
일본은 조선 여성을 비롯해 중국 · 필리핀 · 인도네시아 · 베트남 · 미얀마 · 인도네시아에 거주하는 네덜란드인 여성들까지 일본군‘위안부’로 동원했다. 피해의 정도는 동원된 지역에 따라 달랐다. 동원 형태는 취업 사기, 협박 및 폭력에 의한 동원, 인신매매 및 유괴 등 세 가지였으며, 이 가운데 취업 사기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일본군 당국은 주로 위안소를 민간에 위탁 경영했는데, 이를 위해 위안소를 경영할 업자를 선정하고 운영 규정을 제정해 적용했다. 업자들은 당국의 협조 아래 취직이나 돈벌이를 미끼로 여성과 가족들에게 접근해 동원했다.
1941년 12월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일어나기 전에는 도항증명서를 받아 한반도 외 위안소로 이동했으나, 이후에는 군증명서를 발급받아 수송했다. 군증명서는 모집인이나 인솔자가 소지했으며, 일본군과 경찰은 도항증명서 발급이나 교통수단 제공 등 이동에 필요한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1993년 일본 정부는 고노[河野]담화를 통해 일본군‘위안부’ 동원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인정했다.
강제동원 피해 현황은 명확하지 않다. 일본 정부가 공개한 통계를 근거로 하면, ‘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 등 지원위원회’가 추계한 인원은 중복 인원 포함 7,827,355명인데, ‘위안부’피해자의 경우에는 일본 정부의 공식 통계가 없으므로 파악할 수 없다. 한반도 도내(道內) 동원 피해자의 경우, 여러 차례 중복 동원되었고, 관알선이나 국민징용, 한반도 외 노무동원, 병력동원 등에도 중복 동원되었으므로 실제 동원 규모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노무 동원 | 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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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 도내(道內)동원 | 5,782,581 | 6,508,802 | |
관알선 | 422,397 | |||
국민징용 | 303,824 | |||
국외 | 국민징용 | 222,217 | 1,045,962 | |
관모집 · 관알선 | 823,745 |
군무원 동원 | 계 | 비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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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 7,213 | 63,312 | 피징용자 동원 수를 제외한 수 |
조선 | 15,112 | ||
만주 | 3,852 | ||
중국 | 735 | ||
남방 | 36,400 |
군인 동원 | 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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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특별지원병 | 16,830 | 209,279 |
학도지원병 | 3,893 | |
육군징병 | 166,257 | |
해군(지원병포함) | 22,299 |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패전 선언 후, 일본과 사할린, 동남아시아, 태평양 등지의 조선인은 대부분 자력으로 선박을 구해 다양한 방법으로 귀국했다. 일본 당국과 기업이 귀국선을 구해주지 않고 방치한 탓에 선박을 구하지 못한 채 오랜 기간 항구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일본 정부가 패전 소식을 알려주지 않아 지체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 중서부태평양 · 오키나와에서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모두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폭격이나 사고, 질병 등으로 목숨을 잃거나, 귀국하는 과정에서 기상이변이나 원인 미상의 침몰사고, 선박 화재 사고 등으로 대량의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몇몇 개별 사례만 알려졌을 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다.
남사할린을 제외한 일본 본토에서 사망 및 행방불명된 노무자는 작업장 내 사망 1만 명, 원폭 사망 4만 명, 공습 등 재난 사망 5만 명 등 총 10만 명으로 추정한다. 군인과 군무원의 경우, 일본 후생성의 통계[조선인 사망 및 행방불명 비율 55.9%]를 조선인 군인 · 군무원 272,591명에 적용하면, 172,650명이 된다. 이를 종합하면,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사망 · 행방불명자 추산치는 최소 27만 명으로, 동원된 조선인의 13.5%가 된다.
그러나 이 수치에는 한반도에서 발생한 사망 · 행방불명자 및 귀국하던 중 태풍 등으로 조난당한 해난사고의 희생자는 포함되지 않았다. 관련 자료를 발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지 않았으나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이들도 있다. 사할린에 억류되었던 조선인은 약 4만 6천 명이고, 중국과 만주에서 돌아오지 못한 조선인은 규모를 알 수 없다. 이들 가운데 강제동원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알 수 없다.
일본 국가권력이 수행하는 국가총동원 체제 아래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이 국가권력을 상대로 저항과 투쟁을 벌인다는 것은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 · 집단적인 투쟁과 저항의 사례가 적지 않았다. 양상에 따라 크게 ‘동원 과정에서 나타난 저항’과 ‘동원지역별 · 피해유형별 저항’으로, 내용에 따라 동원 거부 · 작업장 탈출과 같은 ‘소극적 저항’, 비밀결사 · 현지 투쟁과 같은 ‘적극적 저항’으로 관련 사례들을 구분할 수 있다.
노무자의 사례를 보면, 동원 과정에서 탈출이나 동원된 현지에서 벌인 저항과 투쟁 사례가 가장 많았다. 1945년 5월 홋카이도탄광의 송출 실적은 50.7%로, 49.3%가 동원 과정에서 도주했다. 1944∽1945년에 경상북도에서 발생한 대한독립회복연구단 봉기와 대왕산결사대의 대왕산 죽창의거 등처럼 동원 자체를 거부한 집단적인 대응도 있었다. 일본 당국은 송출 과정에서 탈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피검자에 대해 실형을 부과하는 등 강하게 탄압했으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한반도에서 탈출에 실패해 동원된 후에도 동원지역에서 탈출이나 파업과 태업 등 저항은 지속되었다. 일본 내무성의 조사에 의하면, 1939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 강제동원된 조선인 가운데 25만 7,907명이 현장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연도별 탈출 비율은 1939년의 2.2%에서 시작해서, 1940년에는 18.7%, 1941년에 34.1%, 1942년에 38.3%, 1943년에는 39.9%에 달했다. 일본에서 조선인 노무자들이 벌인 파업과 태업은 1,784건에 참가자는 총 108,978명이었다.
1941년 12월 1일 발생한 나가마쓰(永松) 광산 폭동 사건이나 1943년 8월 9일 발생해 해군에 의해 진압된 히로시마 구레(吳)해군시설부 폭동 사건 등 조선인의 집단 대응 사례도 다수 확인된다. 조선인의 집단 대응에 대해 참가자에게 중형을 선고하는 등 일본 당국은 강하게 대응했다.
군인의 경우에도, 징집 자체를 거부한 1943년 ‘학도지원병 지원 거부 사례’가 있었고, 학도지원병으로 징집된 이후 1944년 ‘평양학병의거’, ‘함흥 제43부대 소속 학병집단 탈출 사건’ 등처럼 부대에서 집단적으로 대응하거나 장준하 · 김준엽의 탈출 등처럼 개인적으로 탈출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군인의 탈출 사건은 탈출에 그치지 않고 탈출 이후 만주나 중국의 독립군에 들어가 조선 독립을 위해 군사 활동을 전개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 아래 실행했으므로 일본 당국에 충격을 주었다.
군무원의 저항은 항일투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항일투쟁은 1944년 포로감시원으로 동원된 조선인이 인도네시아에서 결성한 고려독립청년당 투쟁과 태국의 김주석 탈출 사건이었다.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김주석은 포로감시원으로 잠입한 후 영국 및 호주인 포로 일곱 명과 함께 중국 윈난성(雲南省)으로 탈출하다가 헌병대의 추적으로 10여 일 만에 체포되어 군법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태국 방콕에서 처형되었다.
고려독립청년당은 김주석 탈출 사건에 영향을 받아 결성된 단체였다. 군사 기밀 탐지, 인도네시아 민족운동 세력과 공동 전선 결성 후 궐기한다는 목표를 수립하고, 네덜란드인 및 인도네시아 현지 조직과 연대를 시도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던 중 발각되어 2명이 사망하고 10명이 검거되어 징역 2년에서 10년 형을 언도받고 복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