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 ( )

근대사
사건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에 조선인을 광부로 강제동원한 사건.
이칭
이칭
사도금광 조선인 강제동원
사건/사건·사고
발생 시기
1939년 2월
종결 시기
1945년 8월
발생 장소
일본 니가타현(新瀉縣) 사도시(佐渡市)
관련 국가
일본
관련 단체
미쓰비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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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사도광산 조선인 강제동원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에 조선인을 광부로 강제동원한 사건이다. 사도광산은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에 1,519명 이상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한 광산이다. 1939년 2월부터 동원된 조선인의 다수는 갱내 노동에 투입되어 진폐에 노출되었고, 당국의 통제 아래에서도 파업과 탈출을 감행하다가 1945년 12월 말 이후에 귀국했다. 2024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산업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반영하기로 한 일본 정부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정의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니가타현 사도시 사도광산에 조선인을 광부로 강제동원한 사건.
사도광산 연혁

사도광산은 일본 헤이안(平安) 시대 말부터 사금(砂金)의 산지로 알려졌다. 1542년에 은을 캐기 시작했으며, 1601년부터 1989년까지 주로 금을 캤다. 센고쿠(戰國) 시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사도광산의 은을 임진왜란 당시 군자금으로 사용했으며, 에도(江戶) 막부 시대의 권력자들은 금과 은을 통치 자금으로 활용했다.

메이지(明治) 정부의 관유화 조치로, 1868년부터 정부가 운영하다가 1896년에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인수하였고, 1918년에는 미쓰비시광업으로 전환되었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는 주로 구리를 채굴했는데, 이 과정에서 1,519명 이상의 조선인을 강제동원했다. 1989년 3월 모든 채굴을 중단하였고, 그 후 미쓰비시 머터리얼[미쓰비시광업의 후신]의 자회사인 골든 사도가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사도광산과 조선인

사도광산은 메이지 정부 시절부터 조선인과 관련이 있는 곳이다. 조선 정부는 광산 정책에 따라 1889년부터 1902년까지 일본 궁내성(宮內省) 어료국(御料局)이 설치한 사도 광산학교[기술자 양성소]에 조선인 3명을 파견해 근대 광산학을 배우도록 했다.

1902년부터 조선인이 일하기 시작했고, 1902년부터 1929년까지 조선인 광부는 총 21명이었다. 1929년 이후 조선인 광부는 없었으나, 일본이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을 일으킨 후 조선인을 일본 지역에 강제로 동원한 1939년부터 기록에 다시 나타났다.

사도광산의 조선인 강제동원

일본 정부는 1939년 7월 4일 각의결정 「1939년도 노무동원 실시계획 강령」과 1939년 7월 28일 일본 내무성‧후생성 차관이 내린 통첩 「조선인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에 따라 같은 해 9월부터 일본 지역으로 조선인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도광산 측은 정부 방침에 앞서 1939년 2월부터 조선인 동원을 시작했다. 일본인 진폐환자가 늘어나 광석 산출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게 되고 일본 남성의 징집률이 높아져 광부가 부족해지자 조선인 동원이 시급했던 것이다.

1939년 2월에 제1진으로 충청남도 지역 조선인을 동원했는데,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는다. 미쓰비시광업 자료에 따르면, 1940년 648명, 1941년 280명, 1942년 79명, 1944년 263명, 1945년 251명 등 총 1,519명을 충청도, 경상북도, 전라도 등지에서 동원했다.

사도광산 측은 가족을 거느린 광부들을 사택에 거주하도록 했고, 단신자들을 상애료(相愛寮)라는 총 4개소의 합숙소에 수용했다. 그 외에 말을 듣지 않는 조선인을 특별 숙소인 금강료(金剛寮)에 수용하고 폭력적으로 관리했다. 현재 신고로마치(新五郞町)에 있는 제1상애료 자리에는 조선인 합숙소였음을 알리는 게시판이 설치되어 있다.

1943년 사도광업소가 광산감독국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조선인의 대부분은 갱에 들어가 굴진과 채굴을 담당하는 착암부(鑿巖夫) · 지주부(支柱夫) · 운반부 등으로 일했다. 착암부의 조선인 비율은 82%였고, 지주부는 78.6%였다. 굴진과 채굴 업무의 후유증은 광석의 분진이 폐를 굳게 해서 호흡 곤란을 일으키는 진폐증이었다.

이소베 긴조(磯部欣三)의 연구에 따르면, “사도광산 광물의 80%는 진폐를 일으키는 규산 성분이었기 때문에 착암부는 100% 진폐”에 걸렸다고 한다. 갱내 작업에 투입된 광부의 다수가 조선인이었으므로 후유증으로 진폐증을 앓았다. 한국 정부에 신고한 사도광산 피해자의 53%가 진폐증을 호소했고, 26%가 1945년부터 1969년 사이에 사망했다.

사도광산이 1944년 군수성 지정 군수공장이 되면서 사도광산의 모든 광부는 ‘피징용자’가 되었다. 1945년 6월에 일본 당국은 본토 결전을 위해 사도광산 조선인 광부 408명을 사이타마(埼玉)와 후쿠시마(福島)의 군시설 공사장으로 전근시켰다.

사도광산 측은 조선인 광부들을 통제하기 위해 보도학교를 운영하고, 정신교육과 특별교육을 철저히 실시했다. 사도광산 측은 도쿄광산감독국 · 특별고등경찰 · 협화회를 통해 철저히 감시하고 단속했으며, 탈출을 막기 위해 세 곳의 항구를 통제했다.

그러나 조선인 광부들은 1940년 4월의 파업을 시작으로 탈출을 계속 시도했다. 1943년 광산감독국 보고자료에 따르면, 1940년 2월부터 1942년 3월까지 조선인 탈출자는 148명으로 사도광산 조선인의 14.7%에 달했다. 탈출에 실패해 니가타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사례도 있었다.

일본이 패전을 발표한 다음 날인 1945년 8월 16일, 관할 경찰서장과 특별고등경찰계, 사도광산 측은 광산 가동률을 높일 방안으로 조선인의 귀국을 미루고 계속 노동을 시키기로 결정했다. 조선인들은 귀국을 요구했으나 배를 구하지 못하다가 12월 말 이후 귀국길에 올랐다.

사도광산은 2024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산업유산으로 등재되었지만,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반영하기로 한 일본 정부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정혜경, 『팩트로 보는 일제말기 강제동원2–미쓰비시 사도(佐渡)광산의 조선인』(도서출판 선인, 2023)
정혜경‧허광무, 『탐욕의 땅, 미쓰비시 사도광산과 조선인 강제동원』(도서출판 선인, 2021)
『佐渡相川の歷史-通史編, 近現代』(相川町史編纂委員會, 1995)
磯部欣三, 『佐渡金山』(中央公論社, 1992)
『三菱鑛業社史』(三菱鑛業セメント株式會社總務部社史編纂室 編, 1976)

논문

정혜경, 「’조선인 연초배급명부‘로 본 미쓰비시(三菱)광업 사도(佐渡)광산 조선인 강제동원」(『한일민족문제연구』 43, 2022)
広瀬貞三, 「資料紹介 - ‘朝鮮人労働者と佐渡鉱山, 三菱鑛業の史料(1)」(『福岡大學人文論叢』 54-1, 2022)
広瀬貞三, 「佐渡鉱山と朝鮮人労働者(1939~1945)」(『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文科学編] 3, 2000)

기타 자료

「半島勞務管理ニ就テ」(佐渡鑛業所, 1943年 6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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