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마 조선인 강제동원 ( )

근대사
사건
일제강점기,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탄광에 조선인을 광부로 강제동원한 사건.
이칭
이칭
군함도 조선인 강제동원, 하시마탄광 조선인 강제동원
사건/사건·사고
종결 시기
1945년
발생 장소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端島)
관련 국가
일본
관련 단체
미쓰비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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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하시마 조선인 강제동원은 일제강점기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탄광에 조선인을 광부로 강제동원한 사건이다. 1810년경부터 1974년까지 운영된 하시마탄광에서는 1917년부터 조선인 노동자가 일하기 시작했고, 아시아태평양전쟁기에 최대 800명 정도의 조선인이 강제동원되었다. 하시마는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세계산업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반영하기로 한 일본 정부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정의
일제강점기,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탄광에 조선인을 광부로 강제동원한 사건.
하시마탄광 연혁

하시마탄광은 나가사키현 노모반도 서쪽에 있는 해저 탄광으로, 탄광이 있는 하시마는 바다에 떠 있는 군함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도(軍艦島)라 부르기도 한다. 남북 약 320m, 동서 약 120m 크기의 작은 섬이었는데 1897년부터 1931년까지 6차례에 걸친 매립 · 확장 공사로 군함을 닮은 모습이 되었다.

규슈(九州)의 세이히탄전(西彼炭田) 소속인 다카시마탄전[高島炭田]에 속하는데, 1810년경에 처음으로 석탄이 발견되었다. 1881년에 미쓰비시사[三菱社]가 다카시마를 매수하고 1890년 9월 11일에 하시마를 매수한 후 해저 광구 251,000평을 취득해 탄광 개발에 착수했다. 미쓰비시사는 1893년에 미쓰비시 합자회사를 설립한 후 하시마탄광을 다카시마탄갱의 지갱(支坑)으로 관리했다.

하시마탄광의 조선인 노동자

조선인 노동자가 하시마에 들어온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미쓰비시 광업은 다카시마탄전에 개발된 해저 광구를 다카시마탄갱 또는 다카시마광업소로 묶어 관리했기 때문에 하시마탄광의 단독 통계 자료를 찾기 어렵다.

다카시마탄갱 조선인 노동자의 존재는 ‘1917년 말경 150명의 조선인이 다카시마탄갱에서 일하기 시작했다’는 기록과 “안도옹공덕사은비(安藤翁公德謝恩碑)” 비문을 통해 확인된다.

1918년 5월 말 다카시마탄갱의 조선인 노동자는 334명이었고, 이 가운데 하시마탄광의 갱조선인 갱내부(坑內夫) 70명이었다. 1935년 3월 26일, 하시마탄광에서 갱내 가스 폭발로 20명 이상의 갱부가 사망한 사고가 일어났는데, 출신지가 공개된 사망자 17명 가운데 9명이 조선인이었다.

하시마탄광의 조선인 강제동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국가총동원체제에 돌입한 일본 정부는 1939년 7월 4일 각의결정 「1939년도 노무동원 실시계획 강령」과 1939년 7월 28일 일본 내무성‧후생성 차관이 내린 통첩 「조선인 노무자 내지 이주에 관한 건」에 따라 그해 9월부터 일본 지역으로 조선인 노무자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하시마탄갱 노동조합 기록에 의하면, 1943∽1945년간 500∽800명 정도의 조선인 노무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시마탄광에 동원된 조선인의 대부분은 도착 후 1∽2일의 간단한 교육을 받고 갱내에서 주로 위험한 채탄 현장에 투입되었다. 또한 하시마탄광은 해저 탄광이자 누워서 탄을 캐야 하는 ‘사갱(斜坑)’이었다. 조선인은 한 사람이 간신히 통과할 정도의 작은 갱구를 600〜1000m까지 기어가서 물에 젖은 상태로 하루 12시간 이상 채탄했다. 바닷가에 위치한 조선인 숙소에는 바닷물이 들이쳤고, 사람이 파도에 휩쓸리는 일도 있었다.

석탄 증산을 강요하는 강도 높은 작업과 열악한 식량 사정, 일상적인 폭력을 견디기 어려웠던 조선인들은 석탄 상자나 사과 상자 파편을 잡고 헤엄쳐 탈출을 시도했다. 탈출을 막기 위해 일본인 재향군인 회원이 총을 들고 경비를 서기도 했으나 탈출 시도는 그치지 않았다. 탈출에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낮았으며, 대부분 거친 풍랑에 익사하거나, 설령 바다를 건너 다카시마에 도착하더라도 폭력으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일본 당국의 사정에 따라 인력 재배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1944년 8월에는 사할린에서 조선인들을 데려와 하시마에 배치했다. 1943년 여름에는 하시마탄광의 조선인 노무자 350명을 중국인 포로 350명과 교환해 미쓰비시 나가사키조선소에 배치했는데, 1945년 8월 나가사키조선소가 원폭 피해를 입으면서 하시마탄광 출신 조선인들 가운데에도 피폭자가 발생했다.

또한 원폭 투하 후, 일본 당국은 하시마탄광의 조선인들을 나가사키 시내 복구 작업에 투입해 잔류 방사능에 노출되는 피해를 입었다.

하시마탄광에 동원된 조선인은 다양한 이유로 사망했지만 현재 전체 조선인 사망자 수는 파악할 수 없다. 화장(火葬)기록인 「화장인허증 및 변재보고서-나가사키(火葬認許証及び変災報告書-長崎)」에 수록된 조선인 사망자 120명과 추가로 확인한 2명을 포함한 122명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 가운데 강제동원 조선인은 49명으로 추정된다.

일본 패전 이후 하시마탄광

일본 패전 후 미쓰비시가 석탄 생산을 계속하다가 1974년 1월 15일 탄광을 폐광(閉鑛)하면서 하시마는 무인도가 되었다. 하시마는 2001년 미쓰비시가 다카시마정(高島町)에 무상 양도한 후, 2005년 시정촌 합병(市町村合倂)에 따라 나가사키시로 이관되었다. 나가사키시는 폐허가 된 하시마 내부에서 건물 붕괴가 진행되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했다가 2009년 4월부터 하시마 남쪽 견학로를 통해 관광객이 섬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했다.

하시마는 2015년 7월 유네스코 세계산업유산에 등재되었으나, 조선인 강제동원 역사를 반영하기로 한 일본 정부의 약속은 이행되지 않고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박수경·전은옥 역, 도서출판 선인, 2017)
윤지현, 『파도가 지키는 감옥섬』(도서출판 선인, 2013)
『사망 기록을 통해 본 하시마(端島)탄광 강제동원 조선인 사망자 피해실태 기초조사』(국무총리 소속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 지원위원회, 2012)
『사할린 ‘이중징용’ 피해 진상조사』(국무총리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2007)
『지독한 이별: 사할린 이중징용 진상조사 구술기록』(국무총리 소속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 2007)
『軍艦島に耳を澄ませば: 端島に強制連行された朝鮮人‧中国人の記録』(長崎在日朝鮮人の人權を守る会, 社会評論社, 2011)
林えいだい, 『筑豊․軍艦島-朝鮮人强制連行, その後』(弦書房, 2010)
『原爆と朝鮮人 第5集』(長崎在日朝鮮人の人權を守る会, 1991)
林えいだい, 『戰時外國人强制連行關係史料集Ⅱ 朝鮮人 1 下卷』(明石書店, 1991)
前川雅夫, 『炭坑誌-長崎県石炭史年表』(葦書房, 1990)
『原爆と朝鮮人 第4集 - 端島の呻き声』(長崎在日朝鮮人の人權を守る会, 1986)
『原爆と朝鮮人 第2集』(長崎在日朝鮮人の人權を守る会, 1983)
『三菱鑛業社史』(三菱鑛業セメント株式會社,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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