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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덕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54∼598년이다. 한강 하류지역 회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대패해 성왕이 전사하자 즉위했다. 태자로서 이 전쟁을 적극 주장했기 때문에 즉위 초 패전으로 인한 혼란수습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귀족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체제정비에 전념했다. 불교이념을 통한 배타적인 왕족의식의 고양, 국왕의 권력기반인 22부사제의 강화, 역사서 「백제본기」 편찬 등으로 왕권기반이 강화되었다. 신라·고구려에는 적대 정책을 취하고 북제·북주·수와는 활발한 외교를 펼쳐 국제적 위상도 되찾았다.
위덕왕 (威德王)
위덕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54∼598년이다. 한강 하류지역 회복을 둘러싸고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대패해 성왕이 전사하자 즉위했다. 태자로서 이 전쟁을 적극 주장했기 때문에 즉위 초 패전으로 인한 혼란수습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귀족세력과의 합의를 통해 체제정비에 전념했다. 불교이념을 통한 배타적인 왕족의식의 고양, 국왕의 권력기반인 22부사제의 강화, 역사서 「백제본기」 편찬 등으로 왕권기반이 강화되었다. 신라·고구려에는 적대 정책을 취하고 북제·북주·수와는 활발한 외교를 펼쳐 국제적 위상도 되찾았다.
부여 능산리 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567년에 조성된 백제의 왕실사찰이 있던 터이다. 이 사찰은 능산리 고분군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창왕(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하였다. 이후 백제 사비기 국왕들의 명복을 기원하였으며, 백제 멸망과 함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목탑, 중문,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식이다. 출토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 석조사리감이 있다. 이 유적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명확한 축조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삼국시대 건축은 물론 동북아시아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부여 능산리 사지 (扶餘 陵山里 寺址)
부여 능산리 사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에 있는 567년에 조성된 백제의 왕실사찰이 있던 터이다. 이 사찰은 능산리 고분군 인근에 위치해 있으며, 창왕(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하였다. 이후 백제 사비기 국왕들의 명복을 기원하였으며, 백제 멸망과 함께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은 목탑, 중문, 금당, 강당이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된 1탑1금당식이다. 출토 유물로는 국보로 지정된 백제금동대향로, 석조사리감이 있다. 이 유적은 보존상태가 양호하고 명확한 축조연대를 확인할 수 있어 삼국시대 건축은 물론 동북아시아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사비천도는 538년(성왕 16) 백제 성왕이 도읍지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사건이다. 사비는 현재 충남 부여로, 방어에 유리하지만 협소한 웅진에 비해 넓은 평야지대와 금강을 통한 해상교통로를 갖추고 있어 동성왕대부터 관심을 가진 곳이었다. 천도를 실현한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목적으로 부소산성, 왕성 등을 축조하고 체제정비와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성왕은 70년 만에 한성을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며 중흥을 실현하지 못했다. 사비천도는 성왕이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체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백제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사비천도 (泗沘遷都)
사비천도는 538년(성왕 16) 백제 성왕이 도읍지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긴 사건이다. 사비는 현재 충남 부여로, 방어에 유리하지만 협소한 웅진에 비해 넓은 평야지대와 금강을 통한 해상교통로를 갖추고 있어 동성왕대부터 관심을 가진 곳이었다. 천도를 실현한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목적으로 부소산성, 왕성 등을 축조하고 체제정비와 개혁정치를 실시하였다. 성왕은 70년 만에 한성을 회복하기도 하였으나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며 중흥을 실현하지 못했다. 사비천도는 성왕이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체제의 면모를 일신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백제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