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삼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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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은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거주하던 마을로, 조선과 일본 간에 외교 의례와 무역이 이루어진 공간이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동평관(東平館)과 포소 왜관(浦所倭館)이 있었다. 포소 왜관은 조선 전기에는 왜관과 왜리(倭里)가 분리되어 있는 이원적 공간이었다면, 조선 후기에는 왜관과 왜리가 합쳐진 일원적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왜관이 부산에만 있었으며, 조선의 대일정책에 따라 절영도 왜관, 두모포 왜관, 초량 왜관으로 변화하였다.
왜관 (倭館)
왜관은 조선시대에 일본인이 거주하던 마을로, 조선과 일본 간에 외교 의례와 무역이 이루어진 공간이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에 동평관(東平館)과 포소 왜관(浦所倭館)이 있었다. 포소 왜관은 조선 전기에는 왜관과 왜리(倭里)가 분리되어 있는 이원적 공간이었다면, 조선 후기에는 왜관과 왜리가 합쳐진 일원적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왜관이 부산에만 있었으며, 조선의 대일정책에 따라 절영도 왜관, 두모포 왜관, 초량 왜관으로 변화하였다.
조선 시대 삼포를 통해 들어온 왜인들이 가져온 물화를 저장하던 창고이다. 경상도 성주목 임내인 화원현에 위치하고 있다. 현지 매매에 따른 잠상의 불법 행위와 서울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막기 위하여 서울 상인들이 값을 치르고 왜물고에서 물건을 매매하도록 하였다.
왜물고 (倭物庫)
조선 시대 삼포를 통해 들어온 왜인들이 가져온 물화를 저장하던 창고이다. 경상도 성주목 임내인 화원현에 위치하고 있다. 현지 매매에 따른 잠상의 불법 행위와 서울로 수송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막기 위하여 서울 상인들이 값을 치르고 왜물고에서 물건을 매매하도록 하였다.
조선 후기에, 성균관장의를 역임하였으며, 신임사화 때 소론의 탄핵으로 처형된 유생.
윤지술 (尹志述)
조선 후기에, 성균관장의를 역임하였으며, 신임사화 때 소론의 탄핵으로 처형된 유생.
팔포는 조선시대 중국 사행의 공식 인원에게 허가해 준 무역 자금이다. 중국 사행에 필요한 여비를 자비로 부담한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조선 초기에 은화를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고, 인삼 10근씩을 가지고 가도록 했다가 80근으로 늘렸는데, ‘10근씩 여덟 꾸러미’로 포장해서 팔포라고 했다. 은화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 칭량단위여서 인삼이 아니라 국내 생산물 가운데 가죽, 종이, 해삼 등 잡화로 대체할 수 있었다. 역관은 별포라고 하여 각 군문과 아문에서 빌려준 은화로 무역을 대행하거나 무역 권리를 빌려주는 공팔포(空八包)를 활용하였다.
팔포 (八包)
팔포는 조선시대 중국 사행의 공식 인원에게 허가해 준 무역 자금이다. 중국 사행에 필요한 여비를 자비로 부담한 것에 대한 보상 차원에서 사무역을 허용하였다. 조선 초기에 은화를 가지고 가는 것을 금지하고, 인삼 10근씩을 가지고 가도록 했다가 80근으로 늘렸는데, ‘10근씩 여덟 꾸러미’로 포장해서 팔포라고 했다. 은화로 환산할 수 있는 가치 칭량단위여서 인삼이 아니라 국내 생산물 가운데 가죽, 종이, 해삼 등 잡화로 대체할 수 있었다. 역관은 별포라고 하여 각 군문과 아문에서 빌려준 은화로 무역을 대행하거나 무역 권리를 빌려주는 공팔포(空八包)를 활용하였다.
포삼제는 1797년(정조 21) 조선 정부가 공인한 청과의 홍삼 무역제도이다. 재배 인삼을 쳐서 말려 수출하는 홍삼에 세금을 부과하는 규정이다. 중국 사행의 공식 인원은 10근씩 포장한 인삼 팔포, 즉 여덟 꾸러미를 무역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1797년 팔포에 홍삼을 포함시키는 「삼포절목」을 반포하였다. 당시 왜관 무역의 쇠퇴로 인해 일본 은화의 유입이 줄어들었는데 포삼 1근에 일정한 세액을 부과하여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 홍삼이 아편 해독제로 알려지면서 포삼 무역은 크게 증가하였고, 육로와 해로를 통한 밀무역도 크게 번성하였다.
포삼제 (包蔘制)
포삼제는 1797년(정조 21) 조선 정부가 공인한 청과의 홍삼 무역제도이다. 재배 인삼을 쳐서 말려 수출하는 홍삼에 세금을 부과하는 규정이다. 중국 사행의 공식 인원은 10근씩 포장한 인삼 팔포, 즉 여덟 꾸러미를 무역할 수 있었다. 조선 정부는 1797년 팔포에 홍삼을 포함시키는 「삼포절목」을 반포하였다. 당시 왜관 무역의 쇠퇴로 인해 일본 은화의 유입이 줄어들었는데 포삼 1근에 일정한 세액을 부과하여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특히 조선 홍삼이 아편 해독제로 알려지면서 포삼 무역은 크게 증가하였고, 육로와 해로를 통한 밀무역도 크게 번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