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그리고 수찬관으로 강경서(姜景敍)·이세인(李世仁) 등 5명, 편수관으로 유희저(柳希渚)·김근사(金謹思) 등 24명, 기주관으로 이현보(李賢輔)·이사균(李思鈞) 등 7명, 기사관으로 이말(李抹)·성세창(成世昌) 등 16명이 참여하였다. 이 진용 하에서도 편찬의 추진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그것은 여러 차례에 걸친 연산군의 시정기(時政記)가 조사명령으로 인해 당대에 이미 직필(直筆)이 이루어지지 못했고, 사관(史官)이 정청(政廳)·경연(經筵) 등에 참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에 임명된 인물 중 총신(寵臣)이 많아, 당대 사료의 신빙성을 인정하기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 또한, 반정 이후 사관들의 활약이 위축된 상황하에서 무오사화의 충격으로 역대 사관들이 사초(史草)를 제대로 제출하지 않았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