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 사묘 ( )

강화 참성단
강화 참성단
신종교
유적
단군의 영상 · 조상 · 위패 및 단군에 관한 서적 · 유물 등을 모셔 두고 제사를 드리거나 기념하는 전각을 지칭하는 용어.
정의
단군의 영상 · 조상 · 위패 및 단군에 관한 서적 · 유물 등을 모셔 두고 제사를 드리거나 기념하는 전각을 지칭하는 용어.
개설

건국신화에 따르면, 단군은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세운 국조이자 신인(神人)이다. 내용은 『삼국유사』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실제로는 고대부터 한민족의 정신생활 속에서 민족신앙의 핵심이 되어 천손(天孫)이라는 자부심을 갖게 하였고, 민족 주체의식의 원천이 되어 왔다. 이렇게 형성된 민족 주체의식은 역사상 이민족(異民族)의 침략에 항거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역사적 변천

단군을 국조로 숭배하려는 사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고려 충렬왕 때로, 당시 원나라의 압박을 받던 고려 사람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조선 초기에도 진작되어 평양의 단군묘와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대한 숭배의식을 갖기도 했지만, 본격적으로 고조된 것은 한말 외세의 침입과 일제의 침략을 받게 되면서부터이다.

이 무렵 단군을 국조로 하는 역사 연표가 작성되었고, 단군국조를 신앙대상으로 삼는 종교단체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09년 나철(羅喆)이 대종교(大倧敎)를 중광(重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만주로 이전, 항일투쟁의 기수가 되기도 하였다.

8·15광복을 맞이하자 민족자주의식을 자극, 단군을 건국 시조로 하는 단군기원(檀君紀元) 사용 안이 국회에서 결의되고, 단군을 국조로 하는 국사교과서가 발간되었다.

단군이 나라를 세웠다는 10월 3일을 개천절(開天節)이라 하여 국경일로 정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단군역사의 구체화는 독립된 단일민족으로서의 정신적·문화적 통일을 열망하는 민족의식의 발로였다.

이와 함께 학계와 민간에서도 단군에 대한 역사·문화·민속·신화 등에 대한 연구가 전개되었으며, 단군의 통치이념으로 전해 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이념을 받들어 민족문화의 창달과 민족의식을 고취, 민족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단체들이 조직되었다.

한편, 대종교가 환국하자 이와 때를 같이하여 많은 종교단체들이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신봉하게 되었다. 이때는 교단 창립 때부터 단군국조를 신앙대상으로 한 교단이 자체 교단을 정비하고 교세를 확장한 것은 물론이고, 처음부터 단군신앙과는 거리가 전혀 없던 교단에서까지 단군을 곁들여 신앙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단군에 관한 개념도 그들 교단의 교리에 따라 국조(國祖)·국조신(國祖神)·삼신일체신(三神一體神)·삼신각개신(三神各個神)·지방신(地方神)·무속신(巫俗神)·창조적 유일신(創造的唯一神) 등 여러 형태의 신으로 분화, 교체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단군을 숭배하거나 신앙대상으로 하는 단체가 팽창함에 따라 향사(享祀:제사)에 관한 문제가 따르게 되었다. 단군에 대한 향사는 단군신화의 내용 자체를 볼 때 태백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서의 제천(祭天)을 핵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로부터 수반되는 필연적인 문제라고 하겠다.

더구나 부여의 영고(迎鼓), 삼한의 계음(契飮)과 솟대[蘇塗], 고구려의 동맹(東盟), 신라의 일월제(日月祭), 발해의 보본단(報本壇), 고려의 팔관제와 연등제, 그리고 민간신앙으로 전해 오는 산왕제(山王祭)·서당제·당산제(堂山祭)·두류제(頭流祭)·수리제(首里祭)·삼신단지·삼신맞이·고사시루 등이 모두 단군과 관계되는 제천 행위의 내용이다.

또한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塹星壇)과 삼랑성(三郎城), 묘향산의 단군굴과 석주석(石柱石), 평안남도 강동읍의 단군릉(檀君陵)과 단군묘, 황해도 신천의 어천대(御天臺)와 구월산의 삼성사, 태백산정의 제천단(祭天壇) 등은 단군시대의 제천 행적과 단군에 대한 제사와 관계 있는 유적지라고 전해지고 있다.

조선 세종 때 평양에 단군 사당을 지어 동명왕(東明王)과 함께 제사를 지냈고, 그 뒤 이 사당을 수리하여 향사를 계속했다는 것과, 민간에서 구월산 삼성사에 위토(位土:墓位土. 墓祭의 비용을 위해서 경작하는 논밭)까지 두어 환인·환웅·환검(단군)의 삼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문헌적 기록은 광복 후 단군 향사에 대한 관심을 민족적 의식에서나 종교적인 신앙에서 더욱 확대, 고조시키는 것이었다.

이처럼 단군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향사의식이 고조되자 전국 각지에 단군사묘가 건립되었다. 대종교나 단군교(檀君敎)처럼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교단에서 교당과 함께 단군사묘를 따로 세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삼지 않는 다른 교단에서도 별도로 단군사묘를 세우는 예가 많았다.

신앙을 초월하여 국조 숭배라는 민족적 보본의식(報本意識)에서 개인이나 사회에 의해 단군사묘의 설립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 많은 단군사묘가 세워지게 되었다.

내용

단군사묘가 최초로 세워진 것에 대해서는 고대 민속신앙의 제천행사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원류와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헌에 기록된 내용으로는 평양의 단군묘, 구월산의 삼성사, 마니산의 참성단, 태백산의 제천단 등을 말할 수 있는데, 이것들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이미 설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제천행사가 근대까지 계속되지는 못하였다. 현존하는 단군사묘는 대개 일제강점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건립된 것들이다.

(1) 유형

단군사묘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종교단체에서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하여 세운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단체나 개인 그리고 무속숭신 단체에서 세운 것이다. 여기에서 1960년대에 조사된 단군사묘를 앞에서 말한 두 가지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전자의 경우는 대종교의 천진전(天眞殿)·작산단군전(作山檀君殿)·계룡천진전·모촌단군전(茅村檀君殿)·곡성단군전·대전단군전·청동단군전(靑銅檀君殿)·단군대황전(檀君大皇殿)·내산천진전(內山天眞殿)·장하천진전(長蝦天眞殿)·거창단군전·사직단군전·도봉산삼성전·시흥단군전 등이다.

후자의 경우는 증평단군전·남산단군전·왜관국조전(倭館國祖殿)·이리단군전·진주단군전·순창단군전·부산단군전·남선천진전(南仙天眞殿)·밀양천진궁·해남단군전·부여단군전·해남서림단군전(海南瑞林檀君殿)·서산단군전·대구단군전·은적산단군제단(銀積山檀君祭壇)·단성전(檀聖殿)·고창단군전·태백단군전·옥구단군전·담양단군제단·태백산단군제단·어래산단군전(御來山檀君殿) 등이다.

이 사묘들 가운데, 처음에는 종교단체에서 세운 것이지만 뒤에 다른 사회단체로 이관된 것이 있고, 개인이 세운 것도 종교인이 자기 신앙의 대상으로 세운 것이 있으며, 국조를 숭봉하는 뜻에서 세운 것이 있다.

이러한 사묘가 뒤에 창립자가 사망하거나 지역적인 형편에 따라서 종교단체나 사회단체 또는 다른 개인에게 이관된 것도 있으며 없어진 것도 있다. 또한, 개인적인 신앙대상으로 세운 사묘에는 신앙이 다른 종교단체의 것으로 전환된 것도 있다.

(1) 교단

단군을 신앙대상으로 하는 종교단체에서 세웠다는 단군사묘에도 단군만을 신앙대상으로 삼는 교단이 있다.

순수한 단군신앙 계통의 종단이 아닌 다른 교단에서 단군을 자신들의 신앙대상과 함께 곁들여 신앙하는 복합신앙적인 종단도 있다. 또는 자신들의 신앙대상과는 전혀 관계없이 단군을 모셔 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자신들의 신앙대상과 함께 단군을 신앙하고 있는 복합신앙의 교단은 동도교(東道敎)·수운교(水雲敎)·삼덕교(三德敎)·보화교(普化敎)·증산선불교(甑山仙佛敎), 증산대도회(甑山大道會)·동도법종금강도(東道法宗金剛道)·천화불교(天華佛敎)·삼천일지개태사(三天一地開泰寺)·금강대도(金剛大道)·국제도덕협회(國際道德協會)·세계일주평화국(世界一主平和國)·용화불사(龍華佛寺)·무량천도교(無量天道敎)·천상미륵대도(天上彌勒大道)·본문불입종(本門佛入宗)·대한불교미륵종(大韓佛敎彌勒宗) 등이다.

이처럼 비단군계의 교단에서 자기들의 신앙대상과 함께 단군을 곁들여 신앙하거나 향사를 하는 교단, 그리고 전국에 무수한 무속 숭신인(巫俗崇神人)들의 기축도량(祈祝道場)이나 가정신단(家庭神壇)에 단군을 모신 것은 무수히 많다. 더욱이, 근대에는 단군을 신앙하는 종교단체가 부쩍 늘어났다.

이 종교단체에서는 교단 본부나 지부에서 단군을 모시고 향사하는 천단(天壇)을 설치하기 때문에 모두가 단군사묘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 가운데서도 전국에 확산되어 있는 대종교의 지부나 지방 시교당(施敎堂)의 경우, 특별하게 단군전의 규모로서 세운 전각과 일반적인 포교당으로서 단군을 모신 교회당을 보면 어떤 것이 단군사묘이고 어떤 것이 단군사묘가 아닌지 분별하기도 어렵다.

앞에서 본 1960년대에 있었던 사묘 중 없어진 것을 살펴보면, 대전단군전·단군대황전·작산단군전·부산단군전·시흥단군전·계룡천진전·남선단군전 등이다. 종교계·비종교계의 사묘 가운데 1980년도까지 늘어난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청학산평화통일제단(靑鶴山平和統一祭壇 : 대종교의 靑鶴施敎堂)·커발한 개천각(開天閣 : 李裕岦)·고창단군전(高敞鄕校 내)·옥구단군묘(沃溝鄕校 내)·대전단묘(大田檀廟 : 趙炳鎬)·단군성전(檀君聖殿 : 경기도 강화군 선원면, 金海京)·단군전(대전 자양동, 김정숙)·남산단군전(南山檀君殿 : 강화읍 南山里, 申哲鎬)·대성전(大聖殿 : 대덕군 구죽면 탑리) 등이다.

(3) 단군성상 건립논쟁

한편, 1960년대 이후 정부 차원에서 단군성상을 세우거나 단군성전을 건립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특히 1966년 1월경에 정부에서 1억 원의 예산을 들여 서울 남산에 단군성상을 세우는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당시 이에 대해 즉각적인 반발이 일어나 찬반 양론의 공방전이 벌어졌다. 정부의 계획은 단군에 관한 기록이 역사이든 신화이든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받들어 온 개국 시조인 단군의 성상을 세움으로써 민족사의 주체성을 찾자는 뜻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우상숭배를 조장하는 것이라 하여 기독교계가 반발하면서 역사학계로까지 논쟁이 비화되었다.

정부 차원에서 단군성상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의 논리는 단군이 역사적 존재가 아니라 신화적 존재이므로 이를 국조로 숭봉한다는 것은 민족사를 조작한다는 것이며, 실재의 신이 아닌 존재를 우상으로 숭배함으로써 민족을 분열시킨다는 것이었다.

한편, 이에 대해 찬성하는 쪽에서는 단군에 관한 기록이 신화이든 역사이든 간에 한민족의 변함없는 정체성의 원천이며, 따라서 민족의식을 확립하고 민족사상의 통일을 이룩하는 주체로서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격렬한 반대에 부딪쳐 정부의 계획은 무산되고 단군성상 건립문제는 민간운동으로 전개되었다. 1966년에 단군숭녕회가 조직된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특징

(1)단군사묘

현재의 단군사묘는 대개 묘각(廟閣)으로 되어 있지만, 굴(窟)·축단(築壇)·탑비(塔碑)·조상(彫像) 등으로 이루어진 것도 있다. 단군전각은 대개 목조 한식건물로 단층 또는 2층이며 웅장한 건물은 없다. 굴속에서 단군을 봉향하는 예는 묘향산의 단군굴과 서울 남산에 있는 단군굴을 들 수 있다.

축단으로 된 것은 지리산의 노고단(老姑壇)이나 마니산의 참성단, 태백산의 제천단, 담양 장산(長山)의 제천단, 부여의 단군제단 등이 있는데, 돌을 쌓아 제단을 만들어 여기에서 단군에 대한 제사를 올린다. 여기에는 단군비를 세운 곳도 있다.

비를 세운 제단은 태백산·마니산 등 축단으로 된 제단 안에 단군성조의 신위(神位)를 표시하는 비를 세운 것이 있으며, 어래산 단군제단에 국조단군비(國祖檀君碑 : 조국통일기원비)가 있고, 작산단군전 밖에는 상제비(上帝碑)가 있으며, 담양단군제단 등에 비가 세워져 있다. 탑을 쌓아 제단으로 사용하는 사묘로는 청동단군전 안의 원방각형 개천탑(開天塔)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영동 학산의 각세도(覺世道) 교관(敎館)에 무녀(巫女) 계월주(桂月主)가 쌓은 원방각단군탑(圓方角檀君塔)도 있다. 소상(塑像)으로 된 것은 서울 도봉산 삼성전과 강화 남산리 단군성전 밖에 세워진 것이 있고, 대전광역시 중구 대사동용화불사에는 단군소상이 노천에 세워져 있다.

일반적으로 전각으로 되어 있는 사묘에는 보통 전각 안에 단군의 영상이나 위패를 모시는 천단(天壇)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이 천단에 단군을 모시는 형식이 각양각색이어서 한결같지는 않다.

어떤 곳에는 소상이나 주상(鑄像)을 모셔 놓았고, 또 어떤 곳에는 단군성덕(檀君聖德)의 표상이라 하여 천경(天鏡)이라는 둥근 거울을 걸어 두었으며, 어떤 곳에는 위패만을 모셔 두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천부경(天符經)』과 홍익인간의 이념, 자가(自家)의 교강(敎綱)을 제시한 곳이 많다. 한편, 단군전의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2) 단군영상

단군의 영상은 신라의 솔거(率居)가 꿈속에서 단군을 보아 그렸다고 전해 오는 대종교 총본사에 봉안된 것이 진본(眞本)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통용된다.

그런데 요즈음 서울의 사직단군전에 조성된 단군소상을 저본으로 하여 그린 영정이 국민 경모의 대상으로 국가표준 영정 지정을 받았으며, 거의 같은 시기에 대종교의 것이 신앙의 대상으로 문화공보부(현재 문화관광부)에 각각 등록되어 이에 대한 물의가 있다.

이 밖에 각 사묘에 봉안되어 있는 단군의 영상에는 각기 다른 것이 많다. 각자의 주장에 의해 제작된 단군영상은 의관(衣冠)이나 주위의 환경 등이 여러 가지로 다르다.

일반적인 천진전의 단군영상은 대종교 총본사의 천진전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솔거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모습으로 반월모(半月帽)를 썼고, 대전의 용화불사에 모셔진 단군영상은 면류관을 썼다.

서울의 답십리에 있는 어느 사설 제단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단군영상과 설립자가 꿈에 보았다는 단군영상을 함께 모시기도 한다. 용화불사의 경우에는 특이하게도 단군의 부인까지 영상으로 그려 모셔 놓기도 하였다.

단군의 조상은 시흥단군전이 세워졌을 때 그곳에 단군석상을 모셨는데, 이 석상은 단군교주 정훈모(鄭薰謨)가 황해도 구월산 삼성사에서 단군영상과 함께 모셔 온 것이라고 주장하였으나 확인할 길이 없다.

따라서 현존하는 단군조상은 대개 한말에 단군교가 발족된 뒤 대종교인이나 단군교인들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상은 전내(殿內)의 천단에 모시는 경우와 전외(殿外)에 모시는 경우가 있다.

(3) 단군향사

향사의 내용도 목적과 의식 절차에서 각 사묘마다 다르다. 단군을 숭앙하는 내용에는 단순한 민족의 시조로 받드는 것과 신앙대상으로 받드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또, 신앙대상으로 단군을 숭앙하는 데도 단군국조에 대한 보본사상(報本思想)을 기초로 하는 신앙형태와 단군을 무속신과 같이 보는 신앙형태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내용에서 향사의 내용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단군을 국조로 숭앙하는 사묘는 대개 사회단체나 지방민들의 주관으로 향사가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는 단군이 처음 나라를 열었다고 하는 10월 3일 개천절과 단군이 승천했다고 하는 3월 15일 어천절(御天節)의 양대 제향을 주로 한다.

이것도 각 사묘에 따라 음력 또는 양력으로 한다. 향사의식도 대종교에서 하는 것처럼 자체 안에서 새로 만든 것도 있고, 유교의 향교에서 문묘에 하는 것을 모방하여 하는 곳도 있다.

종교단체의 사묘에서는 각 교단의 교리나 주의에 입각, 의식을 행하는 것이 보통이다. 각 교단에서는 일상적 치성예전(致誠禮典)을 위주로 하지만, 개천절과 어천절은 다 같이 지켜지는데, 이때 음력과 양력이 혼용되고 있으며, 또 어천절의 날짜는 3월 16일로 하는 곳과 3월 15일로 하는 곳이 있다.

한편, 종교단체의 제전에는 기도나 기원이 따르게 마련인데, 무속단체의 사묘에서는 양대 절일의 제향보다는 오히려 양재(禳災)·초복(招福)·치병(治病)을 목적으로 하는 기도적 제전이 중요시되고 있다.

대종교에는 주일경배의식(週日敬拜儀式) 등 특별히 제정한 예전의식이 있으며, 송가(頌歌)와 원도문(願禱文)까지도 우리말로 만들어져 있어 진보적이고 엄숙한 예전이 행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대종교의 지부교당 전반에 보급이 제대로 되지 못하여, 어떤 지부에서는 무속단체나 별 차이가 없게 행해지기도 한다.

향사 비용은 대개 종교단체에서는 교인들의 성금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단체나 개인의 사묘에서는 개인이나 단체의 회원 또는 지방 주민이나 유지들의 성금에 의해 이루어진다. 제물도 각양각색이다.

어느 사묘에서는 유교식, 어느 사묘에서는 불교식으로 하며,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사묘에서는 그 종교의 의식 절차와 제물의 정해진 바에 따라 마련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묘에서는 유교식으로 제물을 준비하여 진설(陳設)한다.

참고문헌

『한국신흥종교총감』(이강오,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92)
『한국의 단군사묘』(이강오, 전북대학교 한국신흥종교연구소, 1970)
「단군신앙의 실태분석」(이강오, 『정신문화연구』 3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7)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