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은 높이 12m의 선각(線刻) 마애불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편단우견(偏袒右肩) 차림으로 오른손은 오른쪽 가슴 앞에서 정면을 향해 살짝 틀어 시무외인(施無畏印)을 하고 있고, 왼손은 무릎 근처까지 내려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키는 듯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육계는 자연암반의 튀어나온 부분을 이용한 듯 볼록하게 입체적으로 솟아있고, 그 외에는 모두 선각으로 처리되어 있다. 나발이 표현되지 않은 머리카락 부분은 마치 머리 타래를 얹은 듯 둥그스름하게 부풀어있다. 이렇게 강조된 머리카락은 일본의 청량사(清涼寺)에 있는 북송대 제작한 목조석가불입상과 유사하다. 지그시 감은 눈에 비해 크고 넓적한 코와 윤곽선이 또렷한 입술이 강조되어 있다. 신체의 양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목 둘레로 삼도가 있고, 편단우견으로 드러난 오른쪽 어깨와 팔뚝은 유려한 볼륨감이 드러나 있다. 손가락은 선각 마애불의 특성답게 미묘한 손의 움직임을 회화적 필선으로 정교하게 묘사했다. 하체로 흘러내리는 옷자락은 양 허벅지를 따라 각각 옷 주름을 형성하며 흘러내리는 우전왕상식(憂塡王像式) 착의법을 보여준다. 이렇게 흘러내린 옷자락은 은행잎 모양으로 접히다가 아래로 내려가면서 역삼각형 모양으로 길게 늘어져 있는데, 이러한 착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제작된 경주 굴불사의 사면석불에서도 확인되며 고려불화에 등장하는 부처의 착의법으로도 널리 유행했던 방식이다. 발은 오른발만을 잘 보이게 표현하였는데, 양감을 부여하며 의도적으로 원근감을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이 마애불상의 수인(手印)은 일반적인 시무외 · 여원인(與願印)과는 차이가 있어 주목된다. 특히 아래로 내린 왼손은 손바닥이 바깥으로 향해있는 통상적인 여원인의 형태에 반해서 무엇인가를 움켜쥐려는 듯이 안쪽을 향하고 있다. 또한, 왼팔은 단순히 아래로 뻗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꺾듯이 묘사하여 마치 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처럼 표현하였다. 이러한 수인 묘사는 조선시대 승려 화가 의겸(義謙) 등이 그린 일련의 영산회괘불도(靈山會掛佛圖)에서 주존인 석가모니불이 입상이면서도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한 것처럼 표현되는 것과 비교되어 흥미롭다. 통일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에까지 이어진 전통적인 시무외 · 여원인의 수인이 조선시대 영산회괘불도의 항마촉지인형 수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에 이 가산리 마애불입상이 위치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왼손을 바깥으로 꺾이듯이 표현한 것도 조선시대 불화에 나타나는 다소 왜곡된 인체표현과 유사한데 이와 같은 고려시대 마애불의 도상이 조선시대 불화양식 형성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생각된다.
이 마애불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며 바위기둥들이 병풍처럼 둘러진 금정산 높은 절벽의 가장 끝단에 새겨져 있다. 산 아래에 있는 범어사와 같은 절에서 큰 행사를 할 때 이곳을 방문해 야외법회를 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마애불의 발이 공중에 떠 있어 거대한 불상을 아래서 올려다보면 마치 하늘에서 강림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이러한 배치는 높은 산을 현실 세계와 열반 세계를 이어주는 장소로 간주해 이곳에서 법회를 열면 석가모니가 강림할 것이라는 종교적 믿음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고려시대의 불상은 통일신라 이래의 전통적인 양식을 계승한 것과 지역적 특색을 발전시킨 계통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이 마애불은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조선시대의 새로운 도상과 양식으로 변해가는 중간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특히 석가모니가 영축산 설법에서처럼 산에 강림하는 듯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영산재(靈山齋)와 유사한 의례가 고려시대에 이미 시행되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