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6년(인조 14) 12월 청나라 태종이 10만군을 이끌고 침입, 10여일 만에 서울 근교에 이르자 봉림대군·인평대군 두 왕자와 비빈·종실·조신들을 강화로 피난시켰다.
이듬 해 정월 청나라 구왕(九王: 睿親王)의 군대가 쳐들어와 홍이포(紅夷砲)로 공격하자 유수 장신(張紳), 검찰사 김경징(金慶徵) 등이 모두 달아났다. 성이 함락되자 자결하거나 전사 또는 피살자가 많았는데 이들을 강도순절인이라고 한다.
전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별좌 권순장(權順長), 생원 김익겸(金益謙) 등은 화약을 안고 불에 뛰어들어 폭사하였고, 전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돈녕도정 심현(沈誢), 세자빈을 모시고 있던 윤전(尹烇), 봉상시정 이시직(李時稷), 사복시주부 송시영(宋時永), 익위사장령 정백형(鄭百亨), 민성(閔垶) 등은 자결하였다.
또, 중군 황선신(黃善身), 부천총 강흥업(姜興業)·구원일(具元一), 첨사 김득남(金得男), 파총 이삼(李參)·안몽상(安夢祥), 기패관 이광원(李光遠), 무학 서언길(徐彦吉), 교사 고의겸(高義謙), 정병 차명세(車命世), 수군 송영춘(宋榮春) 등은 전사하였고, 급제 이가상(李嘉相)·주원규(朱元揆)·이중규(李重揆), 첨정 이사규(李士珪) 등은 피살되었다.
이 밖에도 부녀자들로서 윤선거(尹宣擧)의 처 이씨(李氏), 이성구(李聖求)의 처 권씨(權氏), 권순창(權順昌)의 처 장씨(張氏), 이돈오(李惇吾)의 처 김씨(金氏), 이정구(李廷龜)의 처 권씨 등은 자결함으로써 절개를 지켰다.
이들은 정건(鄭楗) 등이 1642년에 세워 16년 뒤에 사액된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또, 1701년(숙종 27)에는 김상용의 증손 김창협(金昌協)이 이들의 사적을 모아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