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택규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공조참판,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성오(性五)
존재(存齋)
이칭
명규(命奎)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3년(숙종 19)
사망 연도
1754년(영조 30)
본관
능성(綾城,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
주요 관직
참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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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공조참판, 형조참판,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능성(綾城). 초명은 구명규(具命奎). 자는 성오(性五), 호는 존재(存齋). 대사성 구성(具宬)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구종주(具宗柱)이고, 아버지는 구혁(具爀)이며, 어머니는 이만저(李曼著)의 딸이다 . 정제두(鄭齊斗)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14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이 된 뒤 삼사의 요직을 역임하고, 1721년(경종 1) 노론의 실각과 함께 외직으로 물러났다. 1731년(영조 7) 진주목사가 되었으며, 1735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어서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739년에는 승지가 되었고 회양부사·부사직(副司直)을 역임한 뒤, 1744년 『속대전』의 편찬에 찬집당상(纂輯堂上)으로 관여하였다.

이듬해 다시 승지가 되었으며, 관동심리사(關東審理使)로 다녀와 삼폐(蔘弊: 삼을 캐는 폐단)를 논하고 대책을 진언하였다. 1746년 『속대전』의 교정당상으로 간행의 책임을 맡았고,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거쳐 1748년 공조참판이 되었다.

그 뒤 형조참판이 되어 전택(田宅)과 노비의 쟁송업무(爭訟業務)를 각각 한성부와 장례원에서 분담하도록 진언하였으며, 『무원록(無寃錄)』을 훈석(訓釋)하여 중간(重刊)하는 일을 주관하였고, 1753년에는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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