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정상부근인 정령치(鄭嶺峙)의 고리봉 아래에 있는 고려시대에 제작된 불상군이다. 전체 12구로 3구는 비교적 잘 보이며, 나머지 9구는 마모가 심한 편이다. 이 중에서 가장 큰 존상은 마애여래입상으로 높이가 4m가량인데, 전체 불상군에서 중심 존격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불상양식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것과 지방에서 특색있게 발전한 양식, 이렇게 두 계통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전라도 지역에서 발전한 독특한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마애불이 위치한 곳은 정령치라는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구례 천은사에 전하는 필사본 『호좌 남원부 지리산 감로사 사적(湖左南原府智異山甘露寺事蹟)』에 따르면 정령치 마애불 인근으로 추정되는 곳에 도선이 창건한 개령암(開嶺庵)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실제 이곳에서 기와편 등이 발견되고 있어서 개령암이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마애불상군은 크게 네 개의 군으로 구분된다. 이 중에서 가운데 두 개의 군에 새겨진 향좌측 불좌상과 향우측 불입상이 규모 면에서 볼 때 전체 도상의 중심존상으로 추정된다. 이들 불상을 중심으로 주변에는 대략 1m에서 40㎝가량의 마애조상이 조성되어 있다. 그 형태를 보면 대형 불입상은 마치 두 손을 모아 소매 안에 넣는 중국식 인사법을 표현한 것처럼 보이는데, 얼굴은 마치 장승처럼 추상적이고 왜곡된 모습을 하고 있다.
마애불이 새겨진 절벽 세 군데에 명문이 남아 있어 주목된다. 첫 번째는 마애불상군 중앙부 상단에 위치한 높이 약 3m의 편단우견 마애불좌상 왼편 부근에 있는 명문이다. 글자는 “비로자나방불, 세전소□, □천보십□, 사사전□□(毘盧遮邦佛 世田小□ □天寶十□ 師士田□□)”으로 판독된다. 두 번째는 여기서 향우측에 자리한 높이 약 4m의 통견 착의 마애여래입상 왼편에 있으며 “세□전명월지불(世□田明月智佛)”로 판독된다. 세 번째 명문은 대형 마애불좌상 서남쪽에 있으며, “천불□멸죄다라, 여타악□보노□가악□진, 비□□아명가왈□화제차, 시□□□백아연, 타가, □제□사(千佛□滅罪陀羅 女他惡□普魯□伽惡□普 卑□□阿明伽曰□和帝此 是□□□白阿衍 他伽 □提□詞”로 판독되고 있다. 이들 명문은 중간에 탈락한 부분이 있어 전체적인 해석은 어렵지만, 불상군 제작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준다. 특히 ‘천보십’은 중국의 오월(吳越) 혹은 남한(南漢)에서 사용했던 연호로 추정되는데, 만약 오월국의 연호라면 천보 10년은 927년에 해당한다. 이 시기에 남원 지역은 후백제 견훤의 통치를 받았으므로 이들 마애불은 후백제 시대로 편년될 가능성도 있다. 한편 ‘명월지불’이라는 존명 역시 마애불의 도상적 의미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성이 있다.
개령암지 마애불상군은 양식적인 면에서 전라남도 화순 운주사의 불상과 여러모로 닮았다. 운주사의 천불천탑에 관해서는 남겨진 기록이 전혀 없어 조성연대 및 주체와 사상적 배경 등에 관해서 많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그와 유사한 개령암지 불상군에는 제작의 단서를 살필 수 있는 명문이 남아 있어 추후 이와 같은 불상양식의 연대설정 및 도상해석에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