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천군동사지는 경주시에서 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보문단지 경주월드 맞은편 논 중앙에 위치한다. 양탑은 거의 같은 양식으로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신라양식의 석탑이다. 시기적으로는 경주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 이후 왕경(王京) 내에 건립된 가장 이른 시기의 쌍탑으로 8세기 초반 신라석탑의 양식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탑으로 평가된다.
쌍탑이 위치한 절터의 원래 이름이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어 창건과 정확한 폐사시기를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1938년 일본인 건축학자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에 의하여 절터의 전면적인 발굴이 실시되었다. 발굴 결과 사찰명을 추정할 만한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쌍탑을 중심으로 중문지, 금당지, 강당지와 가람을 둘러싼 회랑지가 확인되었다. 이때 발굴된 다량의 기와나 치미 등은 왕궁 건축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하여 원래 격조 높은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과 함께 파괴되었던 석탑도 복원되었는데, 3층 탑신 상부에서 사리공이 확인되었으나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동탑과 서탑은 이중기단에 삼층탑신의 양식을 지닌 탑으로, 외관상 양식이 유사하다. 1938년 수리 당시 훼손이 심한 기단부는 일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거나 부분부분 시멘트 모르타르로 채웠다. 그러나 탑신부는 일부 옥개석의 파손을 제외하면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기단부는 하층기단 저석 외곽으로 판석의 탑구를 둘러 놓았다. 탑구는 모서리에 ‘ㄱ’자형 판장석을 두르고 그 사이에 ‘一 ’자형 판석을 끼워 넣은 형태이다. 그러나 양탑 모두 유실된 탑구석이 대부분이다. 하층기단은 면석과 갑석이 1매석으로 되어 있는데, 결구는 모서리에 ‘ㄱ’자형 귀틀석을 두고 중앙에 면석 1매씩을 끼워 넣어 총 8매로 구성되었다. 하대갑석 상면에는 호각형(弧角形) 몰딩을 두어 상대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기단의 결구법은 하층기단의 결구법과는 달리 4매의 판석이 엇물려 결구되었는데, 새로 보충한 부재가 많고 서탑은 신부재의 추가로 부재의 숫자에 차이를 보인다. 상대 갑석은 4매로 구성되었다. 갑석의 하단에는 1단의 갑석부연을 두었고 상단 중앙에는 2단의 각형 받침을 두어 초층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3층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별석으로 총 6매로 처리되었다. 탑신은 모두 네 모서리에 우주를 새겼을 뿐 표면에 문비 등의 장식은 없다. 옥개석은 모두 5단의 층급받침을 지니고 상면에 2단의 각형 받침을 두어 위층 옥개석을 받치도록 하였다. 옥개석 처마 아래 물끊기 홈은 생략되었고 옥개석 귀마루 위 합각선에 1개, 양쪽 전각면에 1개씩의 풍경공이 남아 있다. 상륜이 결실된 동탑 3층 옥개석 상면에는 원형의 찰주공이 남아 있다.
서탑의 경우 노반위에 복발과 보륜2매, 보주가 남아 있다. 노반은 모서리에 우주형을 모각하고 위로 1단의 띠를 돌렸는데, 그 위로 1단 돌출시킨 단을 마련하고 네 모서리에 十자형으로 외연(外緣)을 처리하였다. 복발은 네 곳에 꽃무늬를 두고 2줄의 띠매듭을 돌려 장식성을 더하였다. 복발의 위로는 보륜 2매와 보주로 보이는 부재가 남아 있으나 시멘트 모르타르로 되어 있어 1938년 석탑을 수리할 때 새로 만든 부재로 보인다.
이 양탑은 탑구석을 제외하고 기단부에 16매, 탑신부에 6매 등 수량적으로 초기 신라석탑에 비하면 급격한 양적 축소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기단부 외곽에 보이는 탑구는 이 탑의 가장 큰 특징이다. 탑구는 초기 감은사 서삼층석탑에 나타나고 8세기 중엽에 이르면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탑재의 숫자는 감소했지만 초기 신라석탑의 잔영이 남아 있는 특징을 지닌다. 또한 8세기 상하층 기단 탱주 2:2의 석탑 가운데 하층기단에 결구법에 있어 ‘ㄱ’자형 귀틀석을 쓰고, 상층기단을 판석으로 결구하는 가장 이른 시기의 탑이다.
천군동사지 쌍탑은 기단부 외곽에 설치된 탑구의 구성과 기단부의 결구법에 있어 7세기 석탑의 전승과 새로운 변용이 동시에 존재하는 석탑이다. 또한 경주 왕경 내에 건립된 가장 이른 시기의 쌍탑으로 8세기 새로운 변화를 보이는 신라석탑의 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석탑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