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중대석을 장구 형태로 만든 고복형(鼓腹形) 석등으로 전체적 규모에 있어 장중하면서도 세부 조각이 뛰어나 9세기 통일신라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또한 기단부, 화사석 및 지붕과 상륜부가 완벽하게 남아있어 완성미를 더하고 있다.
석등은 각황전 앞에 위치해 있다. 각황전은 원래 내부에 화엄석경을 봉안한 장육전(丈六殿)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전소된 후 1702년(숙종 28) 다시 지어졌다. 각황전은 의상이 문무왕의 명을 받아 건립했다는 설과 최치원이 쓴 「봉위헌강대왕결화엄경사원문(奉爲憲康大王結華嚴經社願文)」(886)의 내용에 따라 9세기 후반에 건립했다는 설이 있는데, 석등의 양식으로 보아 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석등은 전체적으로 팔각 평면이지만 기단부의 간주석이 장구 모양으로 된 고복형이다. 기단부는 하대석, 중대석, 상대석으로 구성되었는데, 하대석은 팔각의 하단석과 복련석으로 되어 있다. 하단석은 3매의 돌로 조립되었으며 각 면에는 각각 두 개씩의 안상이 있다. 상단석은 팔엽의 복련으로 연꽃잎마다 귀꽃을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했으며 그 위로는 구름모양과 굽형 받침대를 두어 중대를 받고 있다. 중대석은 중앙의 편구형태를 중심으로 위아래로 돌출시켜 마치 장구 모양을 하고 있다. 중심 편구형 부분에는 8곳에 꽃무늬를 배치하고 2줄의 띠매듭으로 연결하였다. 상대석은 하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나 매우 낮게 처리되어 평박한 형태이다. 상대의 연화문은 하대석과 같은 8엽으로, 상단에는 굽형괴임을 각출하여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화사석은 8면으로, 4면에 화창을 마련하였으며 벽면으로 처리된 부분에는 별다른 장식문양이 없다. 화사석 내부는 위아래로 원형 구멍을 두었다. 옥개석은 낙수면이 평박하고 넓게 뻗은 처마가 수평을 이루고 있는데, 각 모서리마다는 화문이 있고 커다란 귀꽃으로 장식되었다. 옥개석의 상면에는 연꽃이 조각된 복련대를 두었다.
상륜부는 노반, 앙화, 보륜, 보개,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 노반은 8각으로 상면에 낮은 1단의 받침을 두어 앙화를 받고 있는데, 앙화는 8각으로 8엽의 화문으로 장식되었다. 보륜은 원형이며 보개는 8각으로 상면 우동이 두툼하게 표현되고 끝이 귀꽃으로 장식되었다. 보개의 위로는 3단의 원통형 받침을 두고 최상부에 연봉형의 보주를 놓았다.
이 석등은 9세기 통일신라 석조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안상과 귀꽃 등을 적절히 배치되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으며 간주석이 장구 모양으로 되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반면 화사석은 별다른 문양이나 장식을 하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크기에 걸맞는 위풍당당한 위용을 보인다. 특히 간주석 및 화사석에서 나타나는 굽형받침이 9세기 후반 석조미술에서 보이는 양식인 점을 감안한다면 제작시기를 파악할 수 있다.
이 석등은 국내 현존하는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세부의 조각 수법도 정교하여 신라 석등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호남지역에 널리 유행한 고복형 석등의 선구적 작품으로 신라하대 석조미술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