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장항리 사지는 토함산 동녘 산중턱에 있는데,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절터에는 국보로 지정된 서 오층석탑 이외에 파괴되어 초층탑신과 옥개석만을 쌓아 올린 동오층석탑이 있으며, 금당터에는 불상대좌가 남아 있다. 절터의 상당 부분이 절개 유실되어 정확한 가람배치나 동오층석탑의 원위치를 알 수 없다. 장항리사지 석탑은 경주 나원리 오층석탑과 함께 경주를 대표하는 오층석탑이며, 신라시대 쌍탑으로는 유일한 오층석탑이다.
석탑이 위치한 절터의 원래 이름과 연혁에 대해서는 남아 있는 자료나 구전조차 없다. 절터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0년대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1㎞ 지점에 금광이 생겨난 후였다. 그런데 1923년 4월 28일 사리장치를 탈취할 목적으로 광산에 쓰이던 폭약으로 서 오층석탑과 불상을 폭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 1932년 석탑은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고, 불상은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옮겼다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몇 번의 복원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동탑은 일제강점기에 절터의 붕괴와 함께 계곡에 떨어져 있던 것을 1966년 2월 수습하여 서탑 옆에 포개놓았다.
석탑은 주변에서 산출되는 밝은 계통의 담백색 화강암을 사용하여 만들었다.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층수에 있어 오층을 유지한 점이 특이하다.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상하층 모두 몇 개의 판석으로 면석이 구성되었다. 하층기단 상부에 호각형 2단 받침을 두고 상층기단 갑석 상면에 2단의 탑신받침과 하단의 부연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 기단의 구성방식과 동일하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이 각각 1매로 되어 있다. 초층탑신 네 면 모두 중앙에 직사각형의 문비를 새기고 중앙에는 괴수형 문고리를 조각하여 장식성을 높였으나 중앙에 문짝 분할선은 생략하였다. 문비 양쪽에는 우주와 맞물려 조각된 금강역사가 있는데, 연꽃을 밟고 서 있는 입상으로 각각 손에 무구(武具)를 쥐고 권법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크기는 작지만 매우 정교하면서도 위엄 있는 자세로 뛰어난 조각수법을 보여준다. 1929년 조사 당시 이곳 초층탑신 상면에서 사리를 봉안했던 사리공이 확인되었다. 2층부터 탑신의 높이는 현저히 낮아졌으며 급격한 체감을 나타내며, 모두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모두 하단에 5단의 층급받침을 두었고 상단에는 2단의 받침을 두어 위층의 탑신을 받치고 있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모서리에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 처마 하단에 물끊기 홈은 생략되었으며 합각선 모서리에 1개, 전각부 양쪽에 각각 2개씩, 총 5개씩의 풍경공이 뚫려 있다.
상륜부는 노반을 제외하고 모두 결실된 상태이다. 노반은 방형의 육면체로 상단에는 원형의 찰주공이 있으며 2단의 돌출대를 두어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 석탑을 구성하는 부재는 기단부가 23매, 탑신부가 10매, 상륜부가 1매, 총 34매이다. 석재의 숫자만을 놓고 본다면 감은사지 삼층석탑, 고선사지 삼층석탑에 비해 엄청나게 줄어든 숫자이다. 특히 같은 오층탑인 나원리사지 오층석탑과 비교했을 때 석재의 숫자가 거의 흡사한 점을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각 부재를 여러 개의 판석으로 조립하여 결구한 탑에서 벗어나 완성된 부재를 쌓아 올리는 누적식탑으로의 이행을 이 탑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오층의 탑신을 유지한 유일의 쌍탑이라는 점과 초층탑신에 금강역사를 새긴 점은 이 탑만의 특징이다. 한편 서탑 옆에 초층탑신과 옥개석만을 포개놓은 동탑에 나타나는 금강역사상은 서탑에 비하여 매우 느슨한 느낌을 주고 있어 조각적으로 매우 다른 양식으로 보인다. 따라서 동시대의 탑이 아닐 것이라는 가능성과 같은 시대의 것이라면 직능을 달리하는 장인이 동시에 참여했을 것이라는 의견들이 있다.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유일의 오층쌍탑 가람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서탑의 위치를 볼 때 금당 앞에 탑이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금당의 좌우측에 위치한다. 또한 좁은 가람 터를 감안한다면 금당에서 약 15m 떨어져 동시대 쌍탑 가람과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토함산 동쪽은 대종천을 따라 신라의 동해구로 나가는 지역으로 일찍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호국사찰들이 창건된 곳이기도 하다. 경주 장항리 서 오층석탑에 새겨진 팔금강은 사천왕과 함께 불법과 국가를 수호하는 신장으로 유행되었다는 점에서 호국적 성격의 사찰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초층탑신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은 불교조각사 및 도상해석학 연구에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