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현재 절터는 경작지로 이용되어 주변에 와편의 일부가 발견될 뿐, 원래 사찰의 범위나 건물터는 전혀 찾을 수 없다. 석탑은 이중기단에 삼층 탑신을 지닌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결실된 상륜부를 제외하면 완벽한 형태이다.
절터는 애공사지(哀公寺址)로 전칭되고 있다. 조선시대 편찬된 경주 관련 지리서인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따르면 애공사는, “경주부(府)의 서십리(西十里)에 신라시대 창건된 절이 있는데, 애공사이다.”라고 되어 있다. 또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 능묘조에 법흥왕릉 및 진흥왕릉이, “애공사의 북봉(北峯)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현재 이 탑이 위치한 곳에서 북쪽편으로는 전 법흥왕릉 이외에 왕릉으로 추정할 수 있는 무덤이 없으므로 전해오는 내용에 의문이 있다. 이 석탑은 1973년 10월부터 12월까지 완전히 해체수리되었으나, 사리장엄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2004년 하층 기단 갑석일부를 수리하여 오늘에 이른다.
기단은 이중기단으로 상하층 모두 공통된 결구수법을 보이고 있다. 상하층기단 모두 면석의 결구에 있어서는 판석을 이용했다. 하층 갑석은 4매의 판석으로 상면에 호각형(弧角形) 몰딩을 두어 상층 면석을 받치고 있다. 상층 기단 갑석은 동서로 맞댄 2매로 구성되었는데, 하단으로는 부연을 두었고 상단 중앙에 각형 2단의 층급받침을 두어 초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탑신부는 3층 모두 옥개석과 탑신석이 각각 1매로 되어 있다. 탑신석은 모두 네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고 면석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다. 초층 탑신에 비해 2층과 3층은 급격히 줄어들어 현저한 체감을 보인다. 옥개석은 각 층 모두 4단의 층급받침을 두었고 상면에 각형 2단의 받침을 두어 위층 탑신을 받치고 있다. 옥개석 처마 하단의 물끊기 홈이나 모서리에 풍경공은 없다. 3층 옥개석 상면으로는 원형 찰주공이 남아 있다. 상륜부는 완전히 결실되었다.
석탑을 구성하는 석재는 기단부가 14매, 탑신부가 6매 등 총 20매로 매우 단순화되었다. 특히 상하층 기단부 면석 모두가 4매로 결구되었고 상층기단 갑석의 숫자가 2매로, 그리고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4단으로 축소되는 등의 통일성을 보인다. 이 같은 결구법은 9세기 모든 석탑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결구법이다. 반면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에 나타나는 몰딩기법이나 옥개석 상단의 2단 받침은 기존의 석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부재의 간략화 속에서도 전통 기법을 따르려는 특징을 볼 수 있다.
9세기 신라 왕경을 벗어난 인근지역 사찰에 소형 탑들이 등장하는데, 경주 효현동 삼층석탑은 경주 남사리 삼층석탑(보물, 1987년 지정)과 함께 이 시기 신라 석탑을 대표하는 석탑이다. 신라 석탑의 구조적 특징에서 본다면 석탑의 크기가 축소되면서 전국적으로 유행하는 상하층 탱주 1:1의 석탑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작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