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촬영기사 이창용(李創用)이 중심이 되어 이기세(李基世)·오덕섭(吳德燮) 등과 함께 설립하였다. 당시로는 최남주(崔南周)가 이끄는 영화회사와 쌍벽을 이루는 단체로서, 1939년부터 본격적인 제작활동에 나섰다. 그 해 3월 영화제작 뿐 아니라 연극공연도 할 목적으로 극단 고협(高協)을 창립하였다.
서울의 동양극장 영화부와 제휴하여 공동합작으로 당시 인기를 모았던 임선규(林仙圭)의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제작비 1만 5000여 원을 투입하여 제작해서 1939년 3월 17일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개봉하여 성공을 거두었는데, 배역들은 주로 동양극장 전속의 황철(黃澈)·차홍녀(車紅女)·변기종(卞基鍾)·심영(沈影) 등이었다.
1940년 가난한 소년의 향학심을 앙양시킨 최인규(崔寅奎) 감독의 <수업료>를 내놓았는데, 제작에 이창용, 원작에 우수영(禹壽榮), 각색에 유치진(柳致眞)으로 출연진은 복혜숙(卜惠淑)·김신재(金信哉)·문예봉(文藝峰) 등이었다.
1940년 11월<승리의 뜰>을, 1941년 2월<집 없는 천사>를 발표하였다. 1941년 3월 만주에서 현지촬영하고 만주영화사(약칭 滿映)와 합작한 전창근(全昌根) 감독의 대작 <복지만리>가 개봉되었다.
이 작품은 중국 상해(上海)에서 활동하고 돌아온 전창근의 귀국 데뷔작으로서, 만주로 집단이민한 우리 동포의 협동정신과 크게는 동아시아 민족의 화합을 그렸다. 그러나 주인공역을 맡았던 전창근은 일본에 저항을 드러냈다 하여, 일본경찰에 붙들려 3개월 여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작품의 성과와 연출은 크게 호평을 받았으며, 특히 처음으로 크레인촬영을 시도함으로써 촬영기술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제작 및 기획에는 이창용, 출연진은 전창근·유계선(劉桂仙)·전옥(全玉)·전택이(田澤二) 등이었다.
1942년 1월 계몽영화 <풍년가>를 개봉하였고, 마지막 작품으로 1943년 4월 29일<망루의 결사대>가 서울 단성사에서 개봉되었다. 일제는 1942년 9월 전쟁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어용단체인 사단법인 조선영화주식회사를 발족하여, 기존의 모든 영화제작단체와 회사들을 통합, 재산몰수 등의 방법으로 강제 해산시켰다.
그러나 고려영화협회는 이 통합에 반대하고 스스로 탈퇴함으로써 해산되었다. 광복 후 최인규 형제가 고려영화사라는 이름으로 재기해서 <안중근사기>·<3·1혁명기>·<해방된 내고향>·<독립전야>·<파시 波市> 등을 발표하였으나, 6·25전쟁 때 최인규가 납북됨으로써 결국 문을 닫았다.
고려영화협회는 민족항일기에 일본에 굴하지 않고 대중들에게 건전한 오락을 제공하는 한편, 은연중에 항일투쟁정신을 보여주었고, 광복 이후 조국광복의 감격과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 작품을 내놓은 데서 그 역사적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