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12월국민좌(國民座)로 개칭하고 1944년까지 지방과 서울공연을 계속하였다. 진용은 배용(裵勇)·조석원(曺錫元)·석와불(石臥佛)·원재진(元在辰)·이화(李和)·정용운(鄭龍雲)·김기성(金基成)·오주남(吳珠男)·유일(柳一)·길성파(吉聲派)·손죽산(孫竹山)·복원규(卜元圭)·송해천(宋海天)·손유성(孫流星)·하지만(河之滿)·황은순(黃銀順)·이윤옥(李潤玉)·김애란(金愛蘭)·김백련(金白蓮)·이순례(李順禮)·구옥희(具玉姬)·김옥신(金玉信)·박미초(朴美草)·김다영(金茶英)·허미라(許美羅)·조계원(趙桂元)·이상신(李祥信)·최영명(崔映鳴)·김연태(金年泰)·백송(白松)·홍원서(洪元瑞) 등이었다.
1939년 12월 1일부터 금천대좌에서 「장한몽(長恨夢)」(복원규 번안)·「형은 정말 구두쇠」(손유성 작)·「소란하던 항구」·「이내 말씀 들어보소」·「결혼일변」 등으로 막을 올리고, 이듬해 6월까지 공연하였다.
7월에 상경, 김연실(金蓮實) 쇼와 동양극장에서 합동공연을 가졌으며, 같은 해 12월 전시체제 아래에서 국가정책에 호응하고 의용연극을 강화하기 위한 반강제적인 조선총독부의 지령 때문에 ‘국민좌’로 극단이름을 바꾸었다.
1941년 2월 남쪽지방 순회공연을 하였고, 4월에는 서울의 동양극장에서 「홍루에 피는 꽃」(홍개명 작)으로 4일간 공연하였으며,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주변 지방 전역을 순회 공연하였다.
같은 해 10월 조선연극협회가 주최한 연극보국주간에 참가, 고야마(小山いと子) 원작 「밤안개」를 공연하고 같은 달 20일부터 5일간 동양극장에서 「세기의 가족」(김태진 작)을 무대에 올렸다. 그 뒤 여러 편의 작품을 공연한 국민좌는 1944년 1월 제일극장에서 안종화(安鍾和) 연출, 강호(姜湖) 장치의 「풍년제」를 끝으로 해산되었다.